[프라임경제] 남의 비극을 조롱할 때는 금기를 깨는 용기라고 했다. 항의가 돌아오면 유머를 모른다고 비웃었다. 남의 상처 앞에서 그토록 대담하던 사람들이 영화 '암살자(들)' 앞에서는 돌연 예의와 존엄을 찾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분노의 크기보다 그 분노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상영 중단을 요구하고, 감독의 국감 출석을 압박하고, 배우와 제작진에게 박정희 묘역 참배와 사죄를 요구한다. 각 학교에는 단체 관람 현황까지 제출하라고 했다. 영화에 대한 불만을 창작자와 관객에게 행사할 권한으로 바꾸려는 장면이다.
그들이 외쳐온 '성역을 깨자'는 구호에는 생략된 단서가 있었던 모양이다.
남의 성역에 한해서.
국민의힘 초선으로 중간 입성한 이진숙 의원의 행보는 그 단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5·18을 폄훼하고 전두환을 미화하는 발언이 쏟아져 나오는 포럼을 공동주최했고,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영상도 공유했다.
그런 인물이 이번에는 박정희에 대한 역사 서술을 문제 삼는다. 남의 역사에는 '재조명'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두더니 자기 진영의 역사에는 출입 자격부터 따진다.
이 모순을 관통하는 말이 '가해자 콤플렉스'다. 가해의 역사를 자기 진영의 영광과 분리하지 못하는 정치적 태도다. 권력의 공적은 자기 자부심으로 물려받으면서 그 권력이 남긴 폭력과 책임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역사에 대한 비판이 곧 자신에 대한 모욕이 된다.

29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김승수 의원이 영화 '암살자(들)'과 관련, 허진호 감독 등을 국정감사 참고인으로라도 불러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피해자가 겪은 고통은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자신이 떠받드는 권력자가 어떻게 묘사되는지에는 과민 반응을 보인다. 피해자의 존엄보다 권력자의 체면을 먼저 지키는 서열 의식이다. 피해자의 역사를 깎아내릴 때는 성역 타파를 외치고 권력자의 권위가 흔들릴 때는 불경죄를 묻는다.
영화의 역사 해석은 비판할 수 있다. 어떤 장면이 어떤 기록과 충돌하는지, 그 상상력이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덧붙였는지 따지면 된다. 과거의 5·18 폄훼가 이 영화의 고증을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배우에게 묘역 참배를 요구하는 순간 논쟁은 작품을 떠난다.
배우가 참배한다고 영화의 고증이 달라지나. 사죄한다고 논란이 된 장면의 역사적 근거가 보강되나. 달라지는 것은 누가 누구 앞에 고개를 숙였느냐는 관계 뿐이다. 작품을 반박할 언어 대신 복종을 확인할 계기와 장소를 정할 뿐이다.
최근 소동의 우스꽝스러움은 바로 거기에 있다. 남의 상처를 건드릴 때는 냉소를 지성처럼 과시하던 사람들이 자기 우상이 해석의 대상이 되자 의전을 요구한다. 그동안의 배짱이 얼마나 상대를 골라 발휘됐는지 스스로 폭로한 셈이다.
흥행 규모와 정치권의 소란 사이에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 10월 1일 오전 7시 집계 기준 '암살자(들)'의 누적 관객은 176만6942명이다. 개봉 2주차 한국영화 박스오피스와 예매율 1위. 관객의 선택을 받고 있지만 천만 관객을 동원한 국민적 현상으로 번진 단계는 아니다.
그런데 대응은 마치 영화 한 편에 대한민국의 존립이 걸린 듯하다. 극장에서 다른 작품들과 경쟁하는 상업 영화에 당 지도부의 불매 독려부터 국감 출석 압박, 학교 관람 현황 요구까지 따라붙었다. 영화의 흥행은 아직 개봉 초반인데 정치권의 호들갑은 이미 국가적 비상사태다.
천만명이 봐도 창작자를 굴복시킬 권한이 생기지는 않는다. 하물며 이 정도의 관객 규모에 이토록 다급하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협으로 느끼는지 되물어야 한다. 관객이 얼마나 많이 봤는지보다 감히 자기 우상을 다뤘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불매는 관객의 선택이다. 비판 역시 자유다. 하지만 그 불쾌감을 학교에 내려보낼 공문과 감독에게 들이밀 국회 출석 요구로 바꾸면 문제가 달라진다.
정치인의 심기가 학교의 행정 업무가 되고, 작품에 대한 반감이 창작자를 압박하는 수단이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던 사람들이 국민의 영화 취향까지 결재하려 든다.
그 호통을 생중계하는 언론도 이 소동에서 빠질 수 없다. 누가 격앙됐고, 누가 불매를 외쳤고, 누가 사죄를 요구했는지 옮기고 받아 쓰는 기사들은 정치인의 분노 자체가 뉴스의 자격을 얻는다. 목소리가 클수록 제목도 커진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묻는 일은 뒤로 밀린다.
'역사 왜곡'이라는 주장을 보도하려면 무엇이 왜곡됐다는 것인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감독을 국감에 부르겠다면 국회가 따질 공적 사안이 무엇인지, 학교에 관람 현황을 요구했다면 그 자료가 왜 필요한지 물어야 한다. 정치인이 영화에 화를 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취재를 끝내서는 안 된다.
발언의 출처가 정확하다고 보도가 충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근거를 검증하지 않은 호통에 따옴표를 붙여 내보내면 언론은 그 호통의 유통망으로 전락할 뿐이다.
상영을 멈추라.
감독을 불러라.
배우는 사죄하라.
명령은 충분히 들었다. 그 명령을 옮겨 쓴 기사들도 충분히 넘친다.
"그래서 보셨나요? 그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