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환율 급등을 여러 차례 경험한 가계일수록 고환율에도 소비를 상대적으로 덜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저자산·고DSR 가계에서 이 같은 적응 효과가 두드러졌다.
1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환율급등 경험과 가계소비 간의 관계 분석'에 따르면 환율급등 경험이 많을수록 환율 상승이 가계소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제한적인 것으로 분석됐다. 반복적인 환율 급등을 겪으면서 가계가 상대적으로 높은 환율 수준에 대응하는 소비행태를 형성했다는 설명이다.
통상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중간재 수입가격 상승 등에 따른 실질소득 감소로 가계소비가 위축될 수 있다. 실제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원·달러 환율 절하율과 가계소비 사이에는 음(-)의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다만 외환위기 이후 환율 급등기에는 가계소비가 당시보다 상대적으로 덜 위축되는 모습도 관찰됐다.
연구진은 한국노동연구원의 한국노동패널 자료를 활용해 지난 1998년부터 2024년까지 가계의 소비행태를 분석했다. 가구주의 연령과 과거 원·달러 환율을 결합해 환율급등 경험변수를 구성하고 현재 환율 수준과 가계소비의 관계를 살폈다.
분석 결과 환율 수준이 높아질수록 과거 환율급등 경험이 많은 가계에서 소비 감소가 상대적으로 제한됐다. 연구진은 반복적인 환율급등 경험을 통해 가계가 구매력 충격과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을 학습하면서 해당 충격을 '관리 가능한 위험'으로 인식하게 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최영준 한은 거시경제연구실 연구위원은 "환율이 급등하면 실질소득과 소득이 줄어 가계는 꼭 필요한 것 이외에 소비를 줄이려 한다"며 "위기를 여러 차례 경험한 세대를 중심으로 가계가 스스로 지출을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등 능동적으로 소비행태를 바꾸면서 적응력을 높이는 현상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자산 규모에 따라서도 차이가 나타났다. 자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가계에서는 환율 수준이 높아질수록 환율급등 경험에 따른 적응적 소비행태가 뚜렷해졌다. 반면 상위 자산계층에서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효과가 확인되지 않았다.
부채 부담이 큰 가계에서도 적응 효과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졌다. 보고서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높은 가계에서 과거 환율급등 경험에 따른 적응적 소비행태가 강하게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세대별로는 X세대와 MZ세대의 차이가 뚜렷했다. 환율 수준이 높은 시기 X세대에서는 환율급등 경험이 소비에 미치는 평균 한계효과가 통계적으로 유의한 양(+)의 값을 나타낸 반면 MZ세대에서는 음(-)의 값을 보였다.
최 연구위원은 "X세대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 참여와 자산 형성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환율 수준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높은 환율 수준에 대응하는 적응적 소비행태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MZ세대에 대해서는 "대규모 환율 상승을 직접 경험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환율 수준이 높은 시기에 대응하는 소비행태를 학습하고 적응할 기회가 제한적이었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품목별로는 적응적 소비행태가 기초소비재보다 선택재에서 더 뚜렷했으며 특히 통신비를 중심으로 확인됐다. 연구진은 반복적인 환율 충격을 경험한 가계가 소비구조를 조정하면서 고환율에 대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까지 오른 상황에서도 가계소비가 크게 위축되지 않은 배경에도 이같은 적응이 일부 작용했을 수 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다만 적응 효과가 계층별로 다르게 나타난 만큼 취약계층의 부담과 소비 양극화를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연구위원은 "가계의 위기 적응력은 고무적이지만, 취약 계층에 집중된 부담과 양극화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며 "정부가 단기적 환율 안정을 넘어 정책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계층별 소비 격차를 면밀히 모니터링해 세심한 보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보고서 역시 정책이 단기적인 충격 완화에 그치지 않고 예측 가능성을 높여 가계의 적응을 지원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또 가계별 소비행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만큼 계층 간 소비 격차가 확대되지 않도록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