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강만수 회장은 서울IB포럼 명부에 등재돼있지만 실제 포럼에 참석한 적도 의견을 제시한 적도 없습니다. 산은홍보실장 드림.’
얄궂은 크리스마스 휴일이 끝난 월요일 아침, 기자의 휴대폰에 장문의 메시지가 찍혔다. 발신자인 산은금융그룹 홍보실의 요구는 간단했다. 해당 기사에서 강만수 회장 언급을 빼달라는 것이었다.
해당 기사는 지난 22일 서울IB포럼(약칭 SIBF)이 발표한 성명서 형태의 보도자료가 발단이 됐다. 자본시장법 개정안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는 호소였다. 내용은 “자본시장 발전과 금융투자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핵심으로 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이른 시일 내에 국회를 통과, 시행될 것을 요청한다”가 핵심이었다.
성명서 하단 발신자로 ‘사단법인 Seoul IB Forum 회원 일동’이라 적혀 있었고 첨부된 회원명부에는 강만수 산은금융그룹 회장과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한 국내 유수의 금융전문가 38명이 올라 있었다.
기자는 해당 자료를 이렇게 옮겼다. ‘강만수 산은금융그룹 회장과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등 서울IB포럼 소속 금융전문가들이 22일 성명을 내고 자본시장법(이하 자시법)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통과를 주문했다…’
기사가 게재된 지 만 24시간이 훌쩍 지난 23일 밤 산은 홍보실에서 급히 기자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려왔다. 홍보담당자는 “회장님이 포럼에 참석에 직접 의견을 내신 것도 아닌데 언급된 것이 부담스럽다”며 제목 삭제를 요구했고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수정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그런데 이틀이 훌쩍 지난 뒤 이번엔 본문에 있는 실명도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입은 돼 있지만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의견을 제시한 적도 없다’고 손사래 칠만큼 서울IB포럼이 가벼운 집단일까. 서울IB포럼은 지난 2007년 국내 주요은행과 증권사, 외국계 IB(투자은행) 대표 등 주요 금융기관 CEO를 중심으로 창설한 금융전문가그룹이다. 창설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당시 산업은행 김창록 총재다.
당시 김 총재는 포럼 창설 기념사에서 “서울IB포럼은 IB에 관심을 가진 모든 기관에 개방돼 있으며 산은은 포럼의 활성화 및 IB전문가 양성 등을 통해 IB산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Facilitator(조력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창설 기념식에는 윤증현 금감위원장이 격려사를 통해 축하 메시지를 전했고 최도성 한국증권연구원장이 ‘글로벌 IB의 비전’을 주제로 강연했다. 또 박병석 국회 정무위원장, 황건호 현 한국금융투자협회장 등 국내 금융업계 ‘거성’들이 총출동했다.
강만수 회장이 애써 관계를 부정할 만큼 서울IB포럼의 ‘사이즈’가 만만하지 않다는 건 증명된 셈이다. 그렇다면 강 회장에게 부담스러운 것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이라는 민감한 이슈라는 얘기다.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지난 7월 입법 예고된 이후 지난 11월22일 국무회의를 통과했지만 아직까지 국회에 잠들어 있다. 여당의 한미 FTA 강행처리 이후 국회 일정이 파행을 겪으면서 논의 자체가 뒷전으로 밀렸다. 내년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앞두고 선거이슈까지 겹쳐 올해는 물론 내년에도 개정안 통과는 불투명한 상태다.
지난 9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에 이어 11월 금융투자업규정 개정으로 헤지펀드(전문사모펀드)와 프라임브로커(전담중개업자) 도입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다. 하지만 자본시장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모든 제도가 절름발이 신세를 면치 못할 처지다.
이미 국내 대형 증권사들은 글로벌 IB 도약을 위해 대규모 유상증자와 사업구조 개편에 착수한 상태다. 법안 통과가 미뤄지거나 최악의 경우 사업 내용을 전면 재검토할 경우 천문학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업계의 속은 타들어가지만 정작 ‘공’을 쥐고 있는 정치권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야당을 중심으로 헤지펀드와 대형IB 육성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해 있다. 여당도 미국에서 촉발된 ‘반(反) 월가 시위’처럼 부패한 금융권에 대한 민심의 분노가 한국에서 재연될까 내심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다.
금융지주의 수장으로 전문 금융인인 강만수 회장이 업계 이슈에 대해 최대한 몸을 사리는 것을 두고 정치적인 포석이 깔린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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