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1897~1910년) 황실은 일본의 자본이 취약한 국내 금융 부문을 잠식하려는 것을 파악하고 이를 막기 위해 상업자본과 힘을 합쳐 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광무제(고종 황제)는 '대한천일은행 창립청원서'를 통해 "화폐융통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이라고 밝히고 내탕금(정부와 예산과 분리된 황실 자산)을 내려 스스로 은행 재원의 주요 부분을 마련했다. 금융 발전이 경제 발전의 기초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아울러 은행의 정관 제10조에는 "한인(韓人) 외에는 깃권(주식)의 매매양도를 불허한다"라고 규정, 민족 금융의 필요성을 갈구함을 천명했다.
대한천일은행은 광무개혁을 추진했던 이용익(보성전문학교 창립자) 등 많은 지사가 황실을 도와 가담했음에도, 러 · 일전쟁, 국권 피탈(경출국치), 헤이그밀사 파견 등 긴박한 정세 속에서 결국 경영난으로 일본 자금이 들어오게 돼 본질이 흐려지게 됐다.
경술국치 이후 1911년 1월 조선상업은행으로 이름마저 바뀌었고, 1912년에는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와 합병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맥은 이어져 상업은행으로 존속하다가, 이후 한일은행과 합병됐다. 따라서 대한천일은행은 현재 우리은행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광무제를 암군(暗君)이라 한다. 명성황후와 대원군간의 권력 다툼에 휘둘렸고, 제국주의 시대 기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결국 나라를 식민지 나락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일정 부분 사실이겠지만, 이후 최근 드러나고 있는 바와 같이, 황실 재산을 해외 유출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려 했다거나, 민족학교 설립에 일찍이 눈을 돌리거나, 해군력을 기르고자 외국 군함을 구매하려 했다는 등 불행하고 능력이 모자란 군주였을지는 몰라도 아무 생각 없는 암군은 아니었던 것으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대한천일은행 설립도 그 증거 중 하나로 높게 평가되고 있다.
우리은행이 13일부터 6월 5일까지 서울 회현동 본점 은행사박물관에서 '우리나라 最古 민족은행 특별전'을 연다고 한다. 이는 연초에 대한천일은행의 창립 관련 문서 및 회계문서 18건 75점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79호로 일괄 지정된 소식과 겹쳐 더욱 뜻깊다.
대한천일은행의 창립 자료들은 한국 금융 · 기업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료들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적극 대처하려고 노력했던 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새롭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금년 초에 금융위원회가 금융중심지 지정을 통해 '동북아 금융허브 국가'로의 도약을 본격적으로 천명하는 등 금융산업 패러다임에 적극 부응하려는 때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지난 해에는 리먼 브러더스 인수를 통한 금융 선진화 추진의 밑그림이 민유성 산업은행장에 의해 추진된 바도 있고 세계적 금융산업체인 씨티그룹으로부터 씨티 동북아 디비전을 인수하려는 작업이 있다는 설이 나오는 등 금융 선진화에 대한 시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민족은행이든, 세계금융 허브든 겉으로는 반대의 그림 같지만 금융 시장 패러다임에 적극 부응하겠다는 점에서는 110년 전 대한천일은행 구상과 오늘날의 여러 움직임이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우리은행이 기획한 이번 전시회는 한 금융기관의 집안잔치라든지 구 황실의 유물전이라기보다는 미래동력을 엿볼 수 있는 기회로 보는 게 더욱 합당할 것 같다. 광무황제의 금융 선진국 꿈은 현재진행형이고, 우리은행뿐만 아니라 금융계 전반의 끝나지 않은 과제이므로 그렇다.
임혜현 기자/프라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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