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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최원병 농협중앙회장을 위한 변명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08.12.09 10:59:06

[프라임경제] 범문정은 청나라 개국공신의 반열에 드는 사람이다.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에 투항했고, 홍타이시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사서에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범문정은 명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 후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어렸을 적부터 명나라를 지배해온 성리학을 닦은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청나라에 붙은 이유가 있다. 명나라는 충효를 내세우는 세력가들이 농민을 수탈하는 반면, 청나라는 전쟁승리의 과실을 농민들에게 되돌려주고 있음을 그는 주목했다. 기층민을 괴롭히고 내부를 좀먹는 병폐를 수술하는 일에 게으른 명 대신 그는 새로 일어서는 청을 택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명나라의 단점을 새왕조 시대에 모두 앞장서 도려내고, 대신 명나라가 유지해 온 제도 중에서 잘된 것,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이식되도록 노력했다. 그만큼 명과 청을 모두 잘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포지셔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명나라에 가장 잔인한 배신자였지만, 청이 초기에 검소하고 소박한 기풍으로 기틀을 닦는 데 설계도를 그린 셈이다. 그러면서도 나중엔 청을 택한 대가로 주어진 높은 벼슬을 스스로 사양하고 물러나 정원을 가꾸며 오래 살다가 죽었다.
결국은 왕조기준으로 보면 배신자라느니 변절자라느니 기회주의적이다, 출세를 위해 물불 안 가렸다는 등 평가도 없지 않았던 모양이나, ‘중국’과 ‘중국인’을 위해서 가장 많은 일을 한 ‘정치가’로 꼽힌다.

◆농협 정치에 대한 MB 비판 속내는?

근래에 “농협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정치를 하려고 든다”는 이른바 ‘가락동 발언’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농협을 향한 진노가 정점에 이르렀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급기야 농협은 살겠다고 중앙회는 물론, 자회사 임원들까지 일괄 사표를 써대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몸집 줄이기도 꽤 할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드는 생각은 농협이 ‘정치를 해서’ 속병이 든 게 아니라 오히려 ‘정치를 모르기 때문에’ 일을 키웠다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가 뭔지 모르는 수뇌부의 정점에는 최원병 농협중앙회 회장이 서 있다고 생각한다.

최 회장은 위덕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안강농협장을 오래 지냈다. 그러니까, 경상도 지역의 실정에 정통한 인사이며, 그만큼 오래 농협의 면면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도 또한 드물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러저러한 일로 이명박 정부에 가까운 인사가 됐든, 혹은 고교 동문이라는 덕을 봤든 혹은 그게 전혀 아니든 간에 속된 말로 잘 나가는 사람이 농협 수장을 하고 있다는 평을 듣게 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세평을 듣는 것은 찝찝하겠으나, 능력으로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힘이 제법 실리는 사람으로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셈이다. 누구보다도 더 강하게 농협의 개혁 드라이브를 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인들의 입방아야 어떻든 이명박 정부 치세 동안 그 자신 뼛속 깊이 느껴온 기존 농협 조직의 많은 병폐를 스스로 고치거나 때로는 막강한 입지를 이용해서라도 밀어붙였더라면, MB시대의 농협상을 새로 구상하고 실현할 만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농민들을 상대로 비료를 파는 업체인 남해화학이 이 농민들이 어려운 시국에 사상 최대의 성과급 잔치를 하는 것도 별반 터치하지 않았고, 농협 산하기관에서 외국산 고기를 수입해 파는 요상한 행태에 대해서도 방치하다가 국회 국정감사 때 덜미가 잡히자 철회하기도 했다. 농협이 야심차게 인수한 NH투자증권은 그의 치세에서 적자를 겪어, 최근 통폐합이 검토 중이다.

조직 개혁에 인색해서 자기가 가졌던 실권을 별반 내놓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것 같지도 않다. 요컨대, 최 회장은 자기가 아는 바를 농협 개혁을 위해 쓸 기회도 포착했고, 또 그럴 만한 예리한 눈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별반 그렇지 않았다. 과실은 그런대로 즐겼던 것 같은데, 일에는 성과가 없었던 듯 싶다.
그러던 그가 최근에는 농협이 대통령 눈 밖에 나자, 아랫 임원들의 줄사표와 ‘회장부터 기득권을 버릴 것’이라는 12월 조회 훈시문으로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이런 배수진은 정치적 레토릭이라고 보기보다는 정치적이지도 못한 말의 연속인 듯 싶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줄사표를 쓰는데 정작 최고수뇌부인 자신은 왜 사표를 내지 않는가? 더욱이 그의 기득권 버리기 발언도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포기가 아니라, 그가 먼저 앞질러 발표하지 않으면 농림수산식품부에서 먼저 농협법 개정 내용으로 치고 나올 것 같아서 밀고 나갔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실제로 그의 조회 발언 직후 농림식품부가 꺼낸 카드를 보면 그가 궁지에 몰려 마지막에 카드에서 손을 털었다는 추측이 전혀 허무맹랑해 뵈지만은 않는다).

그러므로, 농협이 일은 안 하고 정치를 하려 든다는 청와대의 질책은, 외람된 말씀이나, 틀린 말씀이다. 농협은 정치를 모르고, 정치력이 별반 없는 최원병 회장이 이끌고 있어서 정치를 한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최원병 회장이 앞으로 중앙회장을 계속 맡는다면, 이른바 잃어버린 10년 동안 농협을 짓눌러온 적폐를 과감히 일소하고 최상의 농협을 만들어 이명박 정부에 되돌려 줄 수 있을까? 정치를 한다든지 정치적이라든지 하는 표현은 범문정 같은 이에게 쓰는 표현이지, 정치적 격변에 따라 어쩐지 득을 보는 것처럼 보이나 자기 실력을 새 주군을 위해 풀가동하지 않는 최원병 회장 같은 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임혜현 기자/프라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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