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전략)…폐하께서는 마땅히 지혜로운 덕을 크고 넓게 하시어 선제께서 남기신 덕을 빛내기 위해서는 포부가 장엄한 지사의 뜻을 따르시옵고 공연히 충언과 간언을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궁과 관리가 모두 일체가 되어, 벌을 주고 상을 내림에 있어서는 아니 되오며 폐하의 공평한 치도를 드러낼 일이지,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과 밖에서 쓰는 법이 다르면 안 됩니다.시중 곽유지, 비의와 시랑 동윤 등은 참으로 충의만 생각하기에 선제께서 발탁해 폐하에게 남기셨으니 대소사를 막론하여 의논하여…(후략)"
촉한의 재상 제갈량의 '출사표'를 동양 제일의 명문장으로 꼽는 이가 적지 않다.
제갈량,즉 제갈공명은 황족을 따르는 뜨내기 무인 집단이던 촉한을 틀이 잡힌 국가 형태로 만든 공신이다.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몸소 마당을 쓸었으며, 죽으면서 유언을 남겨 무덤은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간소하게 꾸몄다. 실로 28년 동안 한 나라를 좌지우지했으나 유산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그런 충심을 응축한 글로 바로 이 출사표를 꼽는다.
하지만 출사표도 완전무결한 글은 아니어서, 아쉬운 점은 남는다. 북벌을 감행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쓴 글이지만, 행간 곳곳에서 확인되듯 제갈량은 자신의 주군인 유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속내를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사실상 유비 사후의 촉한 운명이라는 과제를 놓고 상당 시일에 걸쳐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비의,동윤,곽유지 등 핵심 측근에게 매사를 물어보고 처리하라는 말이 주군에게 할 말은 아니라는 논란은 논외로 하자.
근래에 이같은 출사표류의 글을 한 편 읽었다.
바로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진 강정원 행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2일자 KB국민은행의 정기조회사다.
강 행장은 2일 정기조회사를 통해 임직원들에게 올해 전략방향 달성을 위해 수익성과 건전성 관리, 경영합리화, 책임경영 등에 매진해 줄 것을 당부했는데 이 조회사에 대해 '어윤대 체제에 힘을 실어주는 포석'이라는 해석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실제로 강 행장은 "신임 어윤대 회장을 중심으로 KB의 안정화에 최선을 다해 KB금융그룹이 성장할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행간의 의미는 어 내정자를 미더워 하는 눈치가 아니다.
강 행장은 "KB의 보유역량에 비해 미흡하고 주주의 요구수준이나 경쟁은행과 비교하더라도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은 여전히 많다고 생각한다"면서 하반기 중점 추진 사항을 강조했다.
강 행장은 경영합리화를 위해서는 경영효율이 개선되는지 등을 지속적으로 분석해 나가면서 새로운 형태의 브랜치 모델(Branch model)을 만들어가자고 주문했다. 아닌 게 아니라, 국민은행은 이를 위해 이달부터 개인과 기업금융을 동시에 제공하는 종합금융서비스 채널로 25개 점포를 통합하고 5개 PB센터의 네트워크를 조정했다. 자기 그림이 상당 부분 이어질 것을 예감 내지 미리 길닦기를 한 듯한 부분이다.
아울러, 부점장급 이상 리더들의 책임경영도 강조, "부점장급 이상 리더들이 전문성과 책임감, 주인의식을 강화해 국민은행이 안팎으로 존경 받는 기업으로 거듭 날 수 있도록 책무완수를 위한 노력을 배가해 달라"고도 했다.
이처럼 자기 퇴임 이후 상당 기간까지를 고민하고 걱정하는 강 행장의 모습은 월권 논란은 물론이고, 제갈량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고 할 수 있다면 비약일까?
아마도 강 행장의 눈에는 화려한 경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본질은 학자로서의 길만 걸어온 어 내정자가 유선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이제 어 내정자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강 행장의 조회사는 기우일 수도, 명문일 수도 있게 됐는데 그 판단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유선의 경우는 적어도 제갈량이 죽고 나서도 무려 31년 동안이나 촉나라를 별 어려움 없이 다스렸다. 어 내정자가 실세 회장 타이틀을 달고 온 이상, 유선만큼은 해야 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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