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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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1 05:07:33
[프라임경제] 갯벌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여러 출연자들이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개중 눈에 띄는 것은 단연 '갯지렁이'라고 생각한다.
갯지렁이들은 뻘에 수억 개의 구멍을 내며 산다. 이 구멍이 뻘에 공기를 불어넣는 허파꽈리 구실을 해, 갯벌은 숨을 쉴 수 있다. 갯지렁이들의 구멍은 작고, 또 애처롭다. 밀물이 들어오면, 거센 바닷물에 쓸려 이 구멍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다.
그러나 갯지렁이들은 이런 구멍들을 또 수없이 뚫는다. 밀물과 썰물이 끊임없이 반복되듯, 이들의 구멍뚫기 노동 역시 '시지프스의 일'처럼 반복된다.
달의 인력이 만드는 밀물과 썰물을 막아서지는 못하지만 이것에 버득버득 맞서며 집을 짓고, 그 외부효과로 갯벌에 생명을 불어넣기에 이들이 갯벌에 만드는 수많은 구멍은 작지만 약하지 않다. 따라서 누가 뭐래도 갯벌에 연관을 짓고 사는 많은 게, 새우, 조개, 물고기, 새들은 갯지렁이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고, 갯벌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갯지렁이다.
최근 삼성그룹이 눈길을 끌고 있다. 대대적인 임원 인사 때문만은 아니다. 그룹 편법승계 등 여러 논란으로 처벌을 받고 그룹의 모든 공식적 자리에서 물러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 대한 사면 논의에 재계는 물론 각계가 스크럼을 짜서 친삼성 모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최근 경제 5단체가 이 전 회장을 포함한 70여명에 대한 사면 건의서를 제출했다"며 "이 전 회장의 사면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 전 회장의 활동 재개를 바라고 있으며, 이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도 사면 찬성의 뜻을 밝힌 바 있다. 재계 뿐만 아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여부에 몸이 단 김진선 강원도지사도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국제 스포츠계에서 영향력 있는 이 전 회장의 활동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삼성은 물론 대단한 기업집단이다.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단순히 재벌이라고 규정하고 넘기기에는 설명이 많이 모자란다. 삼성은 우리 나라 산업의 태동기부터 명맥을 이어왔다. "하면 된다"는 성장 신화를 국민과 함께 써왔다. 많은 기업집단들이 부침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자라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됐다. 외화를 벌어들이고 국위선양을 하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성적표 때문만으로 삼성이 국민적인 사랑의 대상이 되고 많은 젊은이들이 근무하고 싶은 직장으로 꼽는 것은 아니다. 삼성이 이러한 성장을 할 때까지, 수많은 역경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일각에서는 재벌이 성장한 데에는 정권과의 결탁에 의한 비호가 절대적이라고 짠 점수를 주기도 하지만, 삼성 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집단들은 그런 달콤한 파이 몇 조각으로 모두 보상되지 않는 권부의 탄압과 흔들기, 쥐어짜기와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국제경제 상황 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이어왔다.
그런 자력갱생의 중심에 '이건희 회장과 그 일가'가 있다.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성과를 수성하고 천문학적으로 키운 노정에는 대외적으로는 오일쇼크 등의 난점들, 대내적으로는 군사정변들과 같은 고난의 파도가 늘 존재했다. 이런 파도를 이겨내고 무너지면 다시 뚫고 뚫기를 반복한 수많은 구멍들이 오늘날의 삼성 계열사들이고, 이런 구멍들이 공급하는 달러와 정보가 한국 경제라는 갯벌에 숨통을 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삼성과 이 전 회장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 전 회장이 사면되지 않으면 우리 경제가 혹은 동계 올림픽이 전혀 안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 경제라는 갯벌에 열심으로 구멍을 뚫는 갯지렁이 중엔 현대도, 한진도, 롯데도 있다. 삼성이 아니면, 이 전 회장이 아니면 왜 안 된다고만 생각하나? 특히나 갯지렁이가 애달프다 해서, 밀물과 썰물의 흐름 자체를 막는 것은 갯지렁이를 더 이상 갯지렁이가 아닌 '리바이어던(바닷속에 산다는 거대괴물, 영국 학자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정치학 용어로 사용했다)'으로 만들 위험성마저 내포한다.
이미 삼성은 "그룹 자체적으로 국무회의가 가능하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수많은 전직 고위관료들을 영입해 싱크탱크로 쓰고 있으며, 검찰 수사를 상당 부분 무력화할 전문적 논리와 법조 인맥마저 소유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삼성이, 이 전 회장이 각종 논란에 대해 법적인 그리고 도의적인 책임들을 졌다. 이 처벌에 대해서도 상당히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는 불만마저 뒤따르고 있다. 그런데, 벌써 다른 일을 시키자며, 일을 하게끔 해주자며 사면을 언급한다. 이는, 도도한 파도 한 번에 집 하나가 무너졌다고, 이를 애처롭다고 갯지렁이에게 바닷물 자체를 막아주자는 논리나 마찬가지다. 삼성은 이 전 회장과 함께 여태껏 홀로 열심으로 살아왔고 많은 것을 이뤘다. 괜히 어설픈 배려로 한국 경제사상 가장 위대한 갯지렁이를 모욕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