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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은행임원들의 ‘징비록’을 보고 싶다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09.11.25 08:01:32

[프라임경제]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잃고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하다가 간신히 처형을 면하고 백의종군을 시작한 날,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맑음, 오늘 옥문을 나섰다”라고 간단히 전했다. 그 날뿐만 아니라 충무공은 늘상 그의 주변을 괴롭히는 정치적 문제나 그에 대한 감상·울분을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의주 피난정부와 관료들, 그리고 전란 중에도 여전했던 당파싸움의 매서움에 대해 남쪽 바다의 장수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미세하게 들여다 볼 길이 없다. 아마 그런 기록이 언젠가 자신의 발목을 잡거나, 혹은 목을 죌 수 있다고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싶다.

정약용은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천주교도로 몰려 형인 약전과 함께 문초를 당하고 배교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와 그의 형, 그리고 그의 누이와 결혼했던 이승훈은 함께 형장에 시달리면서 처남매부간에 서로의 죄상을 고변하고 배교했던 것 같다.

다만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었는지에 대해 다산은 붓을 들어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저술을 남겨 실학의 거두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정치인들의 존경을 사고 있지만, 내심 자신의 부끄러웠던 기록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오늘날 세계 금융위기 여파 속에서 은행원들의 고임금 논란이 화제다. 그런 한편 비정규직의 상대적으로 불편한 처우 역시 이에 대비돼 화제가 되고 있다.

여론의 질타에 1년여를 시달려온 많은 은행들이 기존행원 5% 반납, 신입직원 임금 삭감 등을 방어책으로 내놨다.

그럼에도 이야깃거리는 줄지 않는다.

많은 은행원들이 이런 논의에 대해 불만스러워 한다. 일부 국책은행 직원들은 과거 들어와 호봉 자체가 높은 직원들이 문제이지 지금 젊은 30대 직원들까지 고액 연봉으로 난타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느 은행 노조 관계자는 같은 일을 하면서 신입 행원만 여론을 의식해 따로 임금 테이블을 짜는 게 이치에 맞지 않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 은행은 신입 행원 임금 협상에 시간이 상대적으로 더 걸렸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비정규직은 정규직들의 이런 푸념이 그저 배부른 소리로 들리는 듯 나름대로 반발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비정규직으로 검사업무를 맡아 일하던 직원들을 해고했다가 소송에 걸려 2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하나은행도 비정규직의 시간 외 수당(은행 측은 이들이 원래 계약상 시간 외 수당 자체가 없는 걸 알았다고 설명하나) 문제로 비정규직 직원들의 원성과 외부에서도 눈총을 사고 있다.

여기에 행원 월급을 깎으면 우수인재의 유인 효과가 떨어진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만난 어느 시중은행 상무는 “요즈음은 그렇잖아도 일 많다고 소문난 모 은행, 모 은행은 은행 중에서도 인기가 없다는데”라면서 연봉이 낮아지면 우수 인재를 다른 은행, 다른 직종에 더 빼앗길까 우려하는 내심을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증권사보다는 낮지만 대체로 제조업을 하는 대기업들보다는 처지지 않는 급여라서 좀 감액해도 큰 인재 유출효과는 없지 않을까라는 보도도 나온다. 19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9월까지 8개 주요 은행 직원의 1인당 급여는 평균 4610만원으로 월급여는 평균 512만원으로 집계됐다. 은행별로는 외환은행이 582만원으로 가장 많았으며 우리은행과 국민은행도 각각 468만원과 486만원으로 400만원대를 기록했다.

대부분의 은행들은 임원 임금과 신입직원 초임 삭감 등 고통분담 조치를 취했지만, 전체 임금근로자의 급여에 비해 2.7~3.5배 많은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임금근로자의 올해 6~8월 월평균 임금은 185만2000원이다. 다만, 증권사 직원의 1인당 급여는 은행 직원보다도 100만원 이상이나 많았다.

한꺼번에 얽혀 있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한꺼번에 듣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은행 임금 논란은 공공의 적인가, 억울한 누명인가?

결국 이렇게 은행 고임금 논란 속에서 가장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이들은 다름 아닌 은행원, 그 중에서도 고위층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언론에 공식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기 꺼린다. 더욱이 이들은 금융위기 속 금융권 재편(M&A)가 조만간 다가올 것이라든지, 내년도에는 본격적으로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할 것이라는 방패막이 있어 이 같은 현안 다음에나 다른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편리한 변명도 가능하다.

하지만 분명 은행원들의 임금은 낮은 편이 아니고, 비정규직과 정규직간의 극명한 차별이 은행 객장 못지않게 드러나는 곳도 드물다. 더욱이 남의 구조조정을 쥐락펴락하는 중차대한 업무 능력에 비하면 이들이 비정규직을 조정하고, 자신의 직원들이 신입 입행 기수 하나에 따라 다른 임금 테이블을 적용받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조정하느냐의 풀이법은 그나마 좀 더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날 은행원들에게 떨어진 이 모든 복잡다단한 문제들의 기록을 어느 은행 임원이든 간에 담담하게 해 주었으면 한다. 아마 행장이나 다른 좋은 자리를 가는 데 장애가 된다는 현실적 이유나 혹은 악역을 맡았던 것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 않을 줄 안다.

하지만 다산이나 충무공이 애써 외면한 기록의 빈칸이 그들의 인간적 매력을 늘려 주지 않듯, 이런 부분

   
   

들에 대해 누군가는 정리해 주어야 할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임진왜란 당시의 참상이 ‘징비록’을 남긴 유성룡의 잘못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몇 년 후에 우리나라 은행들이 어떤 상황을 거쳐 금융위기의 아수라와 비정규직법 시행 초기 국면의 난국을 해결했는지에 대해 모든 걸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자리에 있던 사람이 맥락을 정리해 주면 좋겠다.

아마 지금 고임금 논란 역시 지난 번 IMF 난국 속에서 은행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해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아 사람들의 이해를 사는 데 부족했기 때문에 더 오해가 커진 면이 있을 것이란 점에서, 이런 기록은 향후에 은행권이 다른 직종의 시민들과 어울려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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