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별세, 충격을 주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우리 정치사에서 '전형적인 대통령상'과 거리가 먼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긴 일화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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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08월 06일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너나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에도 유독 어려운 가정 환경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봉하마을에서도 형편이 어려운 축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어려서부터 고집이 센 소년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농협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러나 이후 사법시험을 독학으로 준비, 변호사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짧은 판사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일찍부터 법원을 떠나 세무 사건 전문가로 명성을 날렸다.
◆세무전문 변호사에서 인권운동가로
'돌콩'이라는 이런 시절 별명에서 보이는 그의 고집은 그가 요트를 즐기던 세무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반정부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의 변호를 맡으면서 검찰 등 수사기관의 행태에 분개, 이후 이쪽으로 활동영역을 옮기게 됐다.
노동 사건 등 시국사건마다 머리를 들이미는 그를 골치아프게 생각한 검찰은 제 3자 개입 금지조항을 들어 그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하기도 했다. 이때 기각 당한 영장을 판사들을 바꾸어 가면서 신청했던 해프닝도 있었을 정도로 당시 그와 검찰의 악연은 상당했다.
◆전두환 향해 명패 던진 청문회 스타로 일약 유명해져
이후 1987년 체제가 형성되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노 전 대통령은 이른바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져 일약 청문회 스타로 급부상했다.
이후 부산시장 선거 등에 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지만 연이어 지역 정서 문제로 낙선했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농부가 어찌 밭을 탓하겠느냐"면서 야당 후보로 출말르 고집했다.
이런 그의 이례적 행보는 이후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노사모)'가 결성, 정치인 팬덤이 우리 정치사에 형성되는 단초가 된다.
◆변방에서 중앙으로 일약 등장, 곡절 많은 대통령 시기 보내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 은퇴 약속을 어기고 새천년민주당을 만든 이후에도 민주당을 지키는 소신 정치로(이를 '꼬마 민주당'이라고 흔히 부른다) 이름을 쌓았다.
이후 중앙 정치계에서 명성을 쌓던 중 이회창 대항마로 일약 대통령 후보까지 발탁됐다. 이때 이인제 의원 등 라이벌의 견제와, 일단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이후에도 주류의 흔들기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그의 추종 세력들이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대통령 집권 초에도 탄핵을 당하는 등 어려움이 컸고, 각종 현안마다 한나라당 등 야당의 견제로 정책 추진이 매끄럽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저돌적이고 불같은 성격은 "대통령 못해 먹겠다" 등 시시때때로 정국 불안을 조성하며 야당들에 맞불을 지르는 현상까지 가져오기도 했다.
◆대북 성과 이루고 외환 보유고 쌓는 등 나름대로 성과 남겨
그러나 이 와중에도 그는 검찰 개혁을 시도하고, 대북 정책을 화해 모드로 유지해 나갔다.
국민들의 체감 경제가 어렵다는 불평을 샀지만 외환 보유고를 충분히 쌓는 등으로 이후 이명박 정부 초기 세계 경제 침체기에 기초 자산을 마련했다는 평을 얻기도 했다.
특히 권위주의 정치 문화를 없애고 개헌 논의를 시도하기도 했다. 퇴임 이후에도 온라인 정치를 꿈꾸며 정치 문화 개혁을 주도하려는 꿈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정치적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그의 가족들이 받은 돈이 문제가 돼 거머찰 소환을 당하는 등 굴욕을 당했고, 결국 이 때문에 자살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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