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트렁크는 시대를 담은 작은 집과도 같다."
28일 서울 강서구 마곡 이랜드글로벌R&D센터. 옷걸이와 서랍까지 갖춘 여행 가방은 작은 옷장을 옮겨놓은 듯했다. 긴 항해 중에도 정장과 드레스를 갈아입어야 했던 이들을 위한 '워드로브 트렁크'다. 투어 관계자의 설명처럼 가방에는 짐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담겨 있었다.

28일 서울 강서구 이랜드글로벌R&D센터에서 공개된 1931년형 포드 모델 A 로드스터. 차량 앞편에 여행용 트렁크를 실은 모습으로, 가방을 뜻하던 '트렁크'가 자동차 수납공간의 명칭으로 이어진 배경을 보여준다. = 이인영 기자
마차에 짐을 싣던 시절에는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트렁크 윗면을 둥글게 만들었다. 철도와 증기선이 등장하자 여러 개를 차곡차곡 쌓기 좋은 평평한 형태로 바뀌었다. 이동수단이 달라질 때마다 가방의 모습도 변했다. 진열된 트렁크를 따라 걷는 길은 여행과 디자인의 변천사를 살피는 과정이었다.
이랜드가 30여년간 모아온 과거의 물건들은 지금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 창고로 쓰이고 있다. 이날 여행 가방과 북엔드 컬렉션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 인증을 받은 이랜드는 R&D 아카이브를 취재진에 처음 공개했다. 세계 최대라는 수집 규모 뒤에는 오래된 물건에서 다음 상품의 실마리를 찾는 연구 현장이 있었다.
◆여행 가방 7816점·북엔드 4674점…30년 수집이 세계 기록으로
이랜드그룹은 이날 이랜드글로벌R&D센터에서 기네스 세계 기록 공식 인증식을 열었다. 행사에는 손민영 기네스 세계 기록 심사관과 한우석 이랜드뮤지엄 대표, 서영희 총괄디렉터가 참석했다.

(왼쪽부터)한우석 이랜드뮤지엄 대표, 손민영 기네스 세계기록 공식 심판관, 서영희 이랜드뮤지엄 총괄디렉터. = 이인영 기자
공식 인증을 받은 컬렉션은 여행 가방 7816점과 북엔드 4674점이다. 각각 세계 최대 규모의 여행 가방 컬렉션과 북엔드 컬렉션으로 인정받았다.
두 컬렉션은 이랜드가 1995년부터 구축해온 아카이브의 일부다. 패션과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수집한 소장품은 100만점이 넘는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의상부터 영화 소품, 음악가의 무대 의상과 악기, 스포츠 선수들의 유니폼까지 범위도 넓다.
수집의 출발점은 디자인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직접 확보하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국내에서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였다. 소장품을 전시로 공개하는 동시에 상품 기획과 브랜드 공간에 활용하는 이유다.
서영희 총괄디렉터는 이날 "30년 전 시작한 작은 수집이 오늘 세계 기록이 됐고 이제 100만 점의 아카이브가 돼 미래를 여는 자산이 되려고 한다"고 말했다.
◆북엔드부터 재봉틀까지…소장품 사이 남겨진 연구 흔적
인증식 이후 지하 1~2층 아카이브를 둘러봤다. 첫 번째로 만난 기네스 컬렉션은 북엔드다. 책이 쓰러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도구지만 형태는 동물부터 역사적 인물, 건축물까지 다양했다. 작은 물건 하나에도 당대 사람들의 관심사와 취향이 반영돼 있었다.

이랜드글로벌R&D센터 내 아카이브에 진열된 북엔드 컬렉션. 책을 받치는 도구에 꽃과 동물, 인물 등 다양한 디자인을 담았다. = 이인영 기자
이랜드는 북엔드에 지식과 기록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물 위에 떠 있는 도서관'을 콘셉트로 한 R&D센터와도 연결된다는 설명이다. 수집한 북엔드는 패션과 외식, 호텔 등 그룹 사업 공간에서도 콘셉트에 맞춰 활용한다.
이어진 공간에는 15개 브랜드의 타자기와 약 2100점의 재봉틀 컬렉션이 자리했다. 크고 무거운 타자기에서 휴대용 모델로 이어지는 변화, 손잡이를 돌리거나 발판을 밟아 작동시키던 재봉틀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었다.
재봉틀과 함께 놓인 전용 케이스도 수집 대상이었다. 본체뿐 아니라 당시 함께 사용한 케이스와 부속품이 남아 있을수록 소장품의 완전성이 높아진다는 설명이다. 유리 너머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보이는 수장고'에는 패션 관련 도구와 기계들이 보관돼 있었다.

이랜드뮤지엄 아카이브의 주요 소장품.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영화 '십계'와 '스타워즈'의 특수효과 촬영에 사용된 카메라, 재봉틀과 퀼트 컬렉션, 타자기. = 이인영 기자
눈길을 끈 것은 소장품 사이에 남겨진 직원들의 메모였다. 자료를 살펴보고 디자인과 브랜드에 활용하기 위해 연구한 흔적이다. 이랜드뮤지엄 관계자는 과거의 창의성과 도전정신에서 직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도록 소장품을 수집하고 보존한다고 설명했다.
◆30만점 의류 빌려 쓰는 '옷 도서관'…넥타이도 배색 연구 자료
지하 2층 패션 아카이브에서는 수집한 자료가 실제 업무에 쓰이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약 1000평 규모의 공간에 의류 샘플 약 30만점을 모았다. 디자인 전문 서적도 1만7000여권 보유하고 있다.
안내를 맡은 정태림 패션연구소장은 이곳을 스파오와 미쏘, 뉴발란스 등의 디자이너들이 실제로 이용하는 공간으로 소개했다. 필요한 샘플을 찾아 꺼내 보고 대여하는 방식이다.
옷은 패딩과 코트, 재킷 등 품목별로 분류돼 있었다. 디자이너가 패딩을 기획한다면 해당 구역에서 참고할 옷을 찾을 수 있다. 샘플마다 붙은 작은 라벨은 관리 시스템과 연결돼 누가 어떤 옷을 빌렸고 어떻게 활용했는지 확인하는 데 쓰인다.
정 소장은 단순 진열을 넘어 실제 옷을 꺼내 활용하는 실용적인 도서관이라는 점을 차별점으로 꼽았다.
웨스턴 셔츠와 군복 등 시대와 용도가 다른 옷들도 연구 자료다. 군복에서는 카고팬츠와 야상 점퍼 등으로 이어진 형태를 살피고, 오래된 옷에서는 새로운 상품에 적용할 디테일을 찾는다.

이랜드글로벌R&D센터 내 패션 아카이브에 보관된 넥타이 컬렉션. = 이인영 기자
약 3만점의 넥타이 역시 넥타이를 제작할 때만 쓰이는 자료가 아니었다. 작은 면적에 담긴 무늬와 색상 조합은 시즌 상품을 기획하는 데 활용된다. 옷 한 벌과 소품 하나가 형태와 패턴, 배색 등 여러 갈래의 참고 자료가 되는 셈이다.
◆가방의 변화부터 영화 속 의상까지…브랜드 이야기로 확장
여행 가방 컬렉션에서는 자동차도 함께 만났다. 전시된 포드 모델 A 로드스터를 통해 초기 자동차에 여행용 트렁크를 싣던 방식과 자동차 짐칸을 '트렁크'라고 부르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포르쉐 앞에서는 보닛을 열어 앞쪽 수납공간을 보여줬다. 엔진이 뒤쪽에 있는 차량 구조에 따라 짐을 싣는 위치도 달라진 것이다. 좁은 공간에 맞춰 제작한 전용 여행 가방이 등장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교통수단은 가방의 크기뿐 아니라 형태와 수납 방식까지 바꿨다.

이랜드뮤지엄 아카이브에 전시된 마릴린 먼로 컬렉션.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먼로가 착용한 드레스와 출연작 포스터 등을 선보이고 있다. = 이인영 기자
대중문화 소장품은 브랜드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활용된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컬렉션에서는 이랜드 외식 브랜드 애슐리와의 연결점을 소개했다. 브랜드명이 영화 속 인물인 애슐리 윌크스에서 비롯됐으며, 관련 의상과 포스터 등을 특화 매장에 전시해 브랜드의 배경을 알려왔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활용은 호텔과 리조트로도 이어진다. 켄싱턴호텔 평창에서는 올림픽 관련 소장품을, 켄싱턴호텔 설악에서는 비틀즈 관련 소장품을 선보인다. 고객이 머무는 공간에 문화 콘텐츠를 더해 브랜드 경험을 확장하는 방식이다.
이랜드뮤지엄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개최한 전시는 20여차례로 누적 관람객은 110만명을 넘어섰다.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과 미국 아카데미 영화박물관 등 해외 문화기관에도 소장품을 대여해왔다.
이랜드는 앞으로 소장품을 순차적으로 공개하고 최대 30개 부문의 기네스 세계 기록에 도전할 계획이다. 이랜드글로벌R&D센터를 세계 최대 규모의 컬렉션을 갖춘 패션 R&D센터로 선보인다는 구상이다.
이랜드그룹 관계자는 "30년 동안 모아 온 아카이브가 세계 기록으로 인정받아 뜻깊다"며 "앞으로도 소장품을 순차적으로 공개하고 최대 30개 부문의 기네스 세계 기록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