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라임경제] 소월의 이 시는 그가 20대 초반이던 1925년에 쓰여졌는데, 1965년경 서영은이 음율을 넣어 유주용이 불렀다.
소월 시 145편이 가곡이나 가요시로 만들어진 결과 우리나라 가곡 700여 곡 중 20% 정도가 소월의 시로 만들어졌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 독일여성의 강릉살이
'부모'가 유일한 히트곡으로 이 노래를 부른 유주용의 아버지 유재성은 중국과 독일 베를린공과대학에서 유학한 수재로 공군대령과 동아대학 공과대학장을 역임했다. 유학중 만난 독일인 여성 브리기테 폰 보데(한국명 봉보남)를 강릉으로 데리고 와 1940년 유주용을 낳았다.
유주용은 1962년 '제1회 신인예술상 연예부문 경연대회'에서 가창부문 수석을 차지하며 곧바로 서울대 물리대를 중퇴하고 미8군 무대에서 데뷔했다.
그 당시 같이 활동한 가수들은 모두 명문대 출신으로 최희준, 박형준, 위키리 등이다. 그는 김동건 아나운서와 서울대 입학동기이기도 하다.
다문화가정의 유주용은 서양적 외모와 훤칠한 키,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여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1968년 그 당시 톱스타 윤복희와 결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러나 윤복희는 1973년 남진과의 스캔들로 이혼하게 되는데, 그 스캔들이 허구였고, 자기를 못 믿은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1976년 남진과 결혼했다고 밝힌 바 있다. 남진과는 3년후 이혼했다. 유신시대, 이런 톱스타들의 뉴스는 매일같이 장안을 들끊게 했다.
그후 유주용은 미국에서 재혼했고, 윤복희는 혼자 살고 있다. 소월 시로 만든 유주용의 권주가도 소개한다.

다시 소월의 얘기로 돌아와 보자. 소월 두 살 무렵 아버지가 정신병으로 사망한 다음 종손이자 장손인 소월은 할아버지인 김안수의 훈도로 성장한다. 실질적으로 부모의 따듯한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소월이었다.
소월의 어머니 장경숙은 키가 컸고 한글을 깨치지 못해 까먹눈이었다. 두 살 때 정신이상으로 방구석에 처박혀 벌벌 떨던 아버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소월.
아버지는 그해 죽었고, 바로 숙모와 살게 된 소월은 그녀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가을에 기나긴 밤 어머니하고"라는 상황은 많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다.
'부모'란 시의 배경은 단지 그를 키워 준 숙모 '계희영'과의 기억에 뿌리를 두었을까. 그녀는 소월이 막 걷기 시작할 때부터 영특함을 알았고 밤마다 본인이 알고 있는 설화나 우화, 민담, 전설 등을 들려주었다.
'토끼전', '춘향전'을 비롯 '콩쥐밭쥐전', '접동새전' 등과 바위, 산, 왕 및 지역에 엮인 전설 등을 들려 주었는데 그녀가 들려준 얘기들이 대부분 그의 시에 나타남은 우연이 아니다.
◆아버지는 두 살 때 죽었는데
많은 이야기가 어린 소월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런 이야기들 중 핍박받고 아련하고, 외로움에 가득찬 슬픈 것들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콩쥐팥쥐나 장화홍련전, 접동새전 등 슬픈 이야기속에서 아버지는 투명이다.
소월의 시 '접동새'엔 의붓어미 시샘에 죽은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두 명의 누나만 나온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시간에는 아버지가 있을 시간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죽고 없고,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일찍 사고를 당했다면 자기는 없을 자식이었을 것이란 맹렬한 자의식은 불쑥 돋는 아픈 존재적 심문으로 그에게 다가왔을 수 있다.
추운 겨울의 기나긴 밤 소년 소월은 숙모와 둘이 앉아 있다. 아들을 책임지지 못한 아버지가 나오는 많은 동화, 설화를 통해 무능한 아버지의 자식들이 겪는 고통과 비극들. 그러다 소월은 묻는다. "나는 어떻게 생겨났어요?"
숙모는 말한다. "내일 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라"고. 숙모의 그 말이 또 하나의 예언이 될 줄이야.
◆너도 부모되어서 살아보리라
소월은 14세 결혼무렵부터 그의 육촌 형이자 오산학교 선생이였던 스승 김억의 가르침으로 시를 쓰기 시작해 25세정도까지 시를 썼다. 그후 32세 생을 마감하기 까지, 일본경찰의 감시와 재정적 궁핍함으로 삶에 대한 끈을 놓고 술과 아편으로 살았다.
부인 홍단실과의 사이에 아들 넷과 딸 둘 등 육남매를 낳는다. 김준호, 은호, 정호, 낙호, 딸인 구생, 구원 등이다. 이들 중 첫째딸 김구생과 김정호만 남쪽에 살았는데 김구생은 전쟁중에 사망했다. 정호의 어머니 홍단실은 "너만이라도 남쪽으로 가라" 그가 남으로 오는 길은 인민군이 되는 것 뿐이었고 한다. 1932년생인 시인의 아들은 포로로 붙잡혀 인천형무소, 부산과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반공포로로 풀려나 자진입대해 1955년 제대했다.
문갑식 전 조선일보 기자의 취재에 의하면 김정호는 생활이 궁핍해 본인이 소월의 아들임을 동아일보에 밝혔으나 변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후 미당 서정주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고 박종화, 구상 시인 등이 돕기는 했으나 애들 육성회비 정도였다고 한다.
정호 사후 그의 아들과 딸인 은숙과 영돈은 할아버지가 남긴 작품의 저작권료 수수에 대해 단 한 번, 미스터 피자의 광고에 문근영이 출연해 "가리비 팍팍뿌려 주시옵소서"로 몇 푼 받은 게 다였다고 한다.
숙모 계희영이 소월의 얼마 안되는 인세를 챙겨갔기에 정작 소월의 가족들은 그것마저 없었다는 얘기도 있다는 말에는 다 지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서울에 살던 숙모 '계희영'은 1968년 나이 80에 직접 집필해 '내가 키운 소월'이란 책을 냈다.
소월의 맏딸 김구생은 전쟁중 사망할 때 여덟 살 딸을 두었었는데 그녀의 손녀는 김상은이다. 소월의 외증손녀로 단국대에서 성학을 공부했고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다. 그녀는 '소월의 노래'라는 제하의 음반을 냈다. 이 음반에서 김씨는 화려한 기교를 부리거나 음색을 뽐내지 않았고 철저히 시에만 맞추어 불렀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소월의 위로만 있을 뿐이에요"라며

증손녀의 맑은 목소리 덕분에 소월은 결코 잊지 못할 시인으로 우리들 곁에 영원히 남을 듯하다.

이상철 위드컨설팅 회장/칼럼니스트·시인·대지문학동인/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회장(前)/국회 환노위 정책자문위원/ 국회의원 보좌관(대구)/ 쌍용그룹 홍보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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