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업무상 질병을 진단받은 노동자에게 가장 힘든 시간은 진단을 받은 순간만큼이나 산재 인정 여부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업무상 사고는 비교적 빠르게 처리된다. 반면 업무상 질병은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특별진찰, 역학조사,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 등 복잡한 절차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평균 228일,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 사이 치료비와 생계 부담은 고스란히 노동자와 가족의 몫이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년 9월 정부는 '업무상 질병 산재 처리 기간 단축 방안'을 발표했고, 최근 근로복지공단이 개최한 현안 점검 회의에서 제도 운영 전반에 대한 점검과 개선 방안 논의가 이뤄졌다.
정부와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상 질병 산재 처리기간을 2027년까지 평균 120일로 단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무엇이 달라지나
이번 대책의 핵심은 "이미 업무관련성이 충분히 축적된 사건에 대해서는 반복적인 절차를 줄이겠다"는 데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근골격계 질병이다. 업무관련성이 반복적으로 확인된 32개 직종은 앞으로 특별진찰을 생략하고 재해조사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를 통해 처리한다.
또 광업 종사자의 원발성 폐암·반도체 제조업 종사자의 백혈병처럼 기존 연구와 판정 사례를 통해 상당인과관계가 충분히 축적된 질병은 역학조사를 생략하는 방식으로 처리 절차를 간소화한다.
다시 말해 업무관련성을 새롭게 입증하기보다, 이미 축적된 의학적・역학적 데이터와 기존 판정 사례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 왜 처리기간 단축이 중요한가
산재보험은 치료가 끝난 뒤 보상하는 제도라기보다는 치료 과정에서 노동자의 소득 공백을 메우기 위한 사회보험으로 봐야한다.
업무상 질병의 경우 퇴직 이후에 신청하고 치료 기간도 길어지게 된다면 산재 결정이 늦어질수록 경제적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일부 직업성 암은 역학조사에만 수년이 걸리는 사례가 있었고, 산재 결정을 기다리던 중 안타깝게 사망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책은 단순히 행정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아닌, 산재보험의 본래 기능인 '신속한 권리 구제'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속도만큼 중요한 것은 공정성
다만 처리기간 단축이 곧바로 좋은 제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업무상 질병은 사고와 달리 질병의 원인이 복합적인 경우가 많다. 처리 절차를 줄이는 과정에서 업무관련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생략되거나, 반대로 새로운 유형의 직업병이 기존 데이터에 없다는 이유 때문에 불리하게 평가돼서는 안 된다.
정부는 △재해조사 전문인력 양성 △업무상질병 전담팀 운영 △AI 기반 심사체계 구축 등을 함께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처리기간 단축은 단순히 절차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조사와 판단의 전문성을 높일 때 비로소 실효성을 가질 수 있다.
◆ 신속·공정한 산재보상 모두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산재보험에서 시간은 단순한 행정절차가 아니다. 치료비와 생계, 재활이 걸린 문제이자 노동자의 권리와 직결된 문제다.
업무상 질병 처리기간을 절반 가까이 줄이겠다는 이번 대책은 분명 환영할 만한 변화다. 다만 신속성은 공정성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이미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를 적극 활용하되, 개별 사건의 특수성까지 놓치지 않는 균형 잡힌 제도 운영이 중요하다.
결국 이들이 함께 이뤄질 때 비로소 노동자가 신뢰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산재보험 제도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허종화 노무법인 소망 부대표노무사
現 대한진폐재해자보호협회 자문노무사
前 강북노동자복지관 노동법률상담위원
前 서울외국인주민지원센터 전문상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