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트
  • 메일
  • 스크랩
  • 글자크기
  • 크게
  • 작게

[발행인 칼럼] "황제가 떠난 날, 민족은 다시 일어섰다"

6·10만세운동 100주년, 그리고 끝나지 않은 기억

이종엽 발행인 | lee@newsprime.co.kr | 2026.06.10 15:18:57
[프라임경제]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중략)...나, 구차히 살며 죽지 못한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에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生民)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는지라...(중략)..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들을 도우리라."- 대한제국 순종효황제' 유조(遺詔, 유언)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 8일자.

1926년 6월 10일.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오늘로 부터 정확히 100년 전 그날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융희 황제(隆熙皇帝)의 인산일(因山日)이었던 이날, 대한의 강토는 거대한 슬픔으로 뒤덮여 있었다. 덕수궁 대한문을 떠난 국장 행렬은 창덕궁을 거쳐 남양주의 능으로 향했고, 길가에는 수 십만 명의 백성들이 운집했다. 사람들은 상복을 입고 있었고, 어떤 이는 말없이 눈물을 훔쳤으며, 어떤 이는 황제가 지나가는 마지막 길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 시대의 군주를 떠나보내는 장엄한 장례식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서울은 단순히 황제를 애도하기 위해 모인 도시가 아니었다. 그날 사람들은 황제의 죽음을 슬퍼한 것과 동시에 나라를 잃은 민족의 운명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1910년 대한제국은 총칼 앞에서 국권을 빼앗겼다. 한일병합조약은 국제법적 정당성 여부를 떠나 당시 수많은 백성들에게 강압과 폭력의 산물로 기록되었다. 황실은 사실상 감금과 다름없는 처지에 놓였고, 대한제국의 황제는 존재했지만 국가 없는 군주가 되었다. 국권을 잃은 백성들은 침묵을 강요당했고, 일본은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조차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지난 4월25일 남양주 유릉에서 순종효황제 100주기 제향 봉행이 진행되었다. 필자와 이준 의친왕가 종손이 함께 이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 프라임경제

그러나 나라는 사라졌어도 민족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융희 황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지만 동시에 조선인들에게는 망국의 상징이자 잃어버린 국가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황제의 붕어는 단순한 황실의 사건이 아니라 대한제국이라는 국가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바로 그 슬픔이 저항의 불씨가 되었다. 식민지의 백성들은 황제의 유조 속에서 노쇠한 임금의 한탄이 아니라, 빼앗긴 조국의 절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절규는 마침내 거리의 함성이 되었다.

황제의 국장 행렬이 서울 도심을 지나가던 바로 그 순간,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꺼내 들었다.

"2천만 동포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대한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

순식간에 만세 소리가 번져나갔다. 장례식에 모인 군중은 더 이상 단순한 조문객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를 잃은 백성이었고, 동시에 독립을 갈망하는 민족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항일 시위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일제는 국장을 준비했지만, 조선인은 그 국장을 독립운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침묵해야 할 장례 행렬은 자유를 외치는 행진이 되었고, 황제를 애도하기 위해 모인 군중은 조국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일제는 총칼로 대한제국을 무너뜨렸지만, 백성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대한제국과 황제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6·10만세운동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3·1운동 이후 간악한 일제의 책동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던 독립운동 세력을 다시 하나로 묶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고, 청년들이 함께 움직였으며,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공동으로 행동했다. 이념과 계파를 넘어 모두가 '대한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모였다.

그 중심에는 융희 황제의 인산이라는 상징이 있었다. 대한제국 황실은 정치적으로는 이미 힘을 잃었지만, 민족적 상징으로서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람들은 황제를 통해 잃어버린 나라를 기억했고, 황제의 마지막 길을 통해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다시 확인했다.

어쩌면 6·10만세운동은 단순한 항일운동이 아니라 대한제국에 대한 '집단 기억의 분출'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황제가 떠나는 길목에서 사람들은 다시 한번 대한제국을 불렀고,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6·10만세운동을 이야기하면서 종종 숫자와 사건만 기억한다. 몇 명이 참여했고, 몇 명이 체포되었으며, 어떤 조직이 주도했는지를 배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날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을 안고 거리로 나왔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황제의 장례식이라는 가장 슬픈 순간을 독립을 향한 가장 뜨거운 의지로 바꾸어 놓았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언제나 그런 곳에서 나온다. 

눈물이 함성이 되는 순간.
상실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
그리고 죽음이 새로운 출발이 되는 순간 말이다.

1926년 6월 10일은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기념한 날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한제국이 민족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난 날이었다. 황제는 떠났지만 민족은 포기하지 않았고, 국권은 빼앗겼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뜨거워졌다.

그날 덕수궁 대한문을 나선 국장 행렬은 단순히 한 황제를 배웅하는 마지막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망국의 아픔을 안고 있던 민족이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걸어 나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 길 위에 다시 서 있다. 당시 청년들이 외쳤던 "대한독립 만세"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를 잃어본 민족이 자유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약속이었다.

황제가 떠난 날. 민족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진정한 '대한의 독립'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미완의 기록을 이렇게 남기고 싶다.

'隆熙 119年 6月10日'

이종엽 발행인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    
맨 위로

ⓒ 프라임경제(http://www.newsprime.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