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국내 제약업계가 문화예술을 접목한 공간과 전시를 확대하며 산업의 경계를 넓히고 있다. 서울 마곡 한복판에 자리한 '한독의약박물관 서울' 역시 의약 유물부터 현대 예술 전시까지 아우르며, 제약산업을 단순한 치료 산업이 아닌 '치유와 경험의 공간'으로 재해석하고 있었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 한독퓨처콤플렉스 1층. 유리창 너머로 햇빛이 길게 내려앉은 전시장 안에는 낡은 약절구와 수술 도구, 푸른빛 약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내부는 의약품 생산 현장과 예술 전시장이 한 건물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었다. 최근 제약업계가 문화·예술을 접목한 공간 확장에 나서는 가운데, 한독(002390)은 의약박물관을 통해 '치료'의 의미를 산업 밖 감각의 영역으로 넓혔다.

'역사 속 치료 도구들' 전시 공간 모습. 한국과 중국, 유럽 등 세계 각국에서 사용된 의료·치료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 박선린 기자
한독의약박물관은 1964년 한독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설립된 국내 최초의 기업박물관이다. 현재는 충북 음성과 서울 마곡 두 공간으로 운영된다.
특히 2024년 문을 연 '한독의약박물관 서울'은 연구시설과 지역 문화공간을 결합한 형태로 꾸며져 접근성을 높였다. 연구개발 중심의 한독중앙연구소가 위치한 한독퓨처콤플렉스 내부 1층에 전시 공간과 정원, 기업 히스토리관이 함께 배치돼 일반 시민도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현재 박물관은 오는 8월31일까지 김서량 작가의 개인전 '들리는 세계 Worlds, Heard'을 비롯해 '역사 속 치료 도구들', '약기, 푸른빛을 담다'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장 중앙에 들어서면 '역사 속 치료 도구들'이 마련된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국과 중국, 영국, 미국, 브라질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실제 사용됐던 의료·약제 도구들이 시대순으로 배치돼 있다. 금속 재질의 수술기구와 유리 약병, 약을 갈아 만들던 절구와 보관함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단순히 오래된 유물을 나열하기보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도구를 발전시켜왔는지를 보여주는 구성에 가까웠다.

'약기, 푸른빛을 담다' 전시 일부. 약기에 담긴 치유의 의미와 청화백자의 미적 가치가 함께 조명돼 있다. = 박선린 기자
내부 안쪽에는 청화백자 약기들이 푸른 조명을 받으며 관람객을 맞는다. '약기, 푸른빛을 담다' 특별전이다. 조선시대 청화백자를 비롯해 중국·유럽 등 다양한 국가의 약항아리와 약기가 함께 놓여 있다. 은은한 푸른색이 전시장 분위기를 한층 차분하게 만들었다.
현장에서 만난 관계자는 청화안료인 코발트의 역사부터 설명했다.
그는 "청화안료는 원래 중동 지역에서 생산돼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유입됐다"며 "초기에는 금보다 비쌀 정도로 귀한 재료였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사용됐지만, 이후 공급이 확대되면서 약기 제작에도 널리 활용됐다"고 말했다. 이어 "약을 담는 그릇에도 단순 기능을 넘어 치유와 품격의 의미를 담고자 했던 옛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전시"라고 말했다.
현재 마곡점에서는 김서량 작가의 개인전 '들리는 세계(Worlds, Heard)'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전시장 내부로 들어서자 공장 기계음과 진동, 금속 마찰음이 낮게 울렸다. 일반적인 미술관과 달리 소리 자체가 전시의 중심이었다. 김 작가는 충북 음성 한독 생산시설과 인근 산업단지에서 직접 채집한 소리를 재구성해 사운드 설치 작품 '백색 공명'을 선보였다.

한독의약박물관 서울에서 진행 중인 김서량 작가 개인전 '들리는 세계 Worlds, Heard'. 공장과 도시, 인간의 관계를 소리와 영상으로 풀어냈다. = 박선린 기자
반자동화 공정이 돌아가는 제약 공장의 소리는 작품 안에서 낯선 리듬으로 변했다. 기계음과 작업장의 공기, 사람의 움직임이 겹쳐지면서 산업 현장을 단순 생산공간이 아닌 또 다른 생태계처럼 느끼게 했다.
김서량 작가는 "그동안 여러 공장을 작업해왔지만 제약회사 생산시설은 유독 독특한 리듬감이 있었다"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도시의 시간을 소리라는 매개체로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직원들에게는 익숙한 근무 공간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고, 일반 관람객에게는 의약품 생산 과정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전시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외에도 여름·겨울 방학 시즌을 중심으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가족 단위로 방문한 한 관람객은 "근처 마곡식물원에 들렀다가 미리 예약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방문했다"며 "아이와 함께 약장 만들기와 한방 방향제 체험을 했는데 아이가 특히 흥미로워했다"고 말했다.
국내 제약업계는 최근 공연·전시·예술 협업 등 문화 콘텐츠를 적극 확대하고 있다. 과거 제품 중심 이미지에서 벗어나 브랜드 경험과 치유의 가치를 강조하려는 움직임이다.
실제 박물관을 둘러보면 이 공간은 단순히 '약을 만드는 회사'의 전시관이라기보다, 인간이 병을 이해하고 치료해온 시간 자체를 기록하는 장소에 가까웠다. 오래된 약기와 공장의 소리, 현대미술과 연구시설이 한 공간 안에 공존하는 풍경은 제약산업이 기술을 넘어 어떤 감각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