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지난 몇 년간 자동차 시장의 무게중심은 SUV로 옮겨갔다. 세단은 과거보다 선택지가 줄었고, 소비자의 관심 역시 넓은 공간과 다목적 활용성을 앞세운 모델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현대자동차(005380) 그랜저가 다시 한 번 존재감을 드러냈다.
현대차가 15일 출시한 '더 뉴 그랜저'는 출시 첫날에만 1만277대의 계약을 기록했다. 이는 2019년 11월 출시된 6세대 그랜저(IG) 페이스리프트 모델의 1만7294대에 이어 역대 페이스리프트 모델 중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이번 성과는 신차효과로만 보기 어렵다. 더 뉴 그랜저는 완전변경 모델이 아닌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다. 더구나 최근 시장은 전기차와 SUV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내연기관 세단의 입지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출시 하루 만에 1만대가 넘는 계약을 끌어냈다는 점은 그랜저라는 이름이 국내 시장에서 여전히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를 세단 시장 전체의 회복 신호로 확대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번 기록의 핵심은 세단이라는 차종 전반의 반등보다 그랜저가 오랜 시간 국내 소비자에게 쌓아온 상징성과 신뢰에 있다. 그랜저는 대중 브랜드 안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고급 세단으로 자리해왔고, 이번 더 뉴 그랜저 역시 그 포지션을 다시 확인시킨 셈이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SUV의 존재감은 이미 압도적이다. 패밀리카 수요는 세단보다 SUV로 옮겨갔고, 전기차 전환 역시 세단보다는 SUV와 크로스오버 차종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과거 중대형 세단이 맡았던 '가족용 고급차' 역할은 이제 여러 차종으로 분산됐다.

현대차의 더 뉴 그랜저가 출시 첫날 계약 대수 1만대를 돌파하며 뜨거운 관심을 입증했다. ⓒ 현대자동차
그럼에도 그랜저는 다른 세단과 다른 방식으로 소비자 선택지에 남아 있다. 단순한 차급이나 차체 형태보다, 국내 소비자에게 축적된 브랜드 기억이 강하게 작동하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랜저는 오랜 기간 '성공한 대중 세단'의 상징으로 소비돼 왔고, 지금도 현대차 라인업 안에서 제네시스와 일반 세단 사이를 잇는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다. 더 뉴 그랜저의 첫날 계약 1만277대는 그래서 의미가 크다. 시장 전체가 세단으로 되돌아갔다기보다, 그랜저라는 특정 모델에 축적된 신뢰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 결과이기 때문이다.
현대차 입장에서도 이번 기록은 그랜저의 역할을 다시 확인한 계기가 됐다. 그랜저를 무리하게 브랜드의 최상단으로 끌어올리기보다, 대중 브랜드 안에서 가장 높은 만족감을 제공하는 세단으로 유지하는 전략이 시장에서 통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번 계약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최상위 트림 캘리그래피의 선택 비중이다. 더 뉴 그랜저 계약 고객 중 캘리그래피를 선택한 비율은 41%로 집계됐다. 기존 그랜저의 캘리그래피 트림 비중 29%와 비교하면 12%포인트(p) 상승한 수치다.
이는 그랜저 고객이 단지 큰 세단이나 합리적인 세단을 찾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의미다. 제네시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현대차 브랜드 안에서 충분히 고급스러운 경험을 누리고 싶어 하는 수요가 더 뚜렷해졌다는 뜻이다.

더 뉴 그랜저의 초기 흥행은 신차급 변화를 지향한 상품성 개선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 현대자동차
특히 최근 신차 시장에서는 가격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소비자의 선택 기준도 세분화되고 있다. 일부 소비자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이동하지만, 또 다른 소비자는 대중 브랜드의 상위 트림을 통해 고급사양과 가격 사이의 균형을 찾는다. 그랜저 캘리그래피 비중 확대는 후자의 수요가 여전히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흐름은 그랜저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그랜저는 현대차의 플래그십이라는 표현보다, 대중 브랜드 안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고급 세단이라는 설명이 더 잘 어울리는 모델이다. 이번 계약 결과 역시 소비자가 그랜저에 기대하는 가치가 '최고급'보다 '현실적인 고급감'에 가깝다는 점을 보여준다.
파워트레인 선택에서도 시장의 흐름이 드러났다. 더 뉴 그랜저의 가솔린 모델 선택 비중은 58%, 하이브리드 모델은 40%다. 하이브리드 모델의 고객인도 시점이 친환경차 고시 등재 일정에 따라 하반기로 예정된 만큼, 초기 계약 수요가 가솔린 중심으로 형성된 모양새다. 그럼에도 하이브리드 선택 비중이 40%에 달했다는 점은 세단의 전통적인 승차감과 정숙성에 효율성을 더하려는 수요가 그랜저 안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더 뉴 그랜저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디지털 경험이다. 현대차는 이번 모델에서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플레오스 커넥트'를 전면에 내세웠다. 외관 일부를 다듬는 수준을 넘어, 차량 안에서 고객이 체감하는 사용 경험을 바꾸는 데 초점을 맞췄다.
페이스리프트 모델은 완전변경 모델보다 변화의 폭을 설명하기 어렵다. 디자인 변화만으로 소비자 관심을 다시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고, 파워트레인 구성도 큰 틀에서 기존 모델의 연장선에 놓인다. 현대차가 더 뉴 그랜저에서 디지털 경험을 강조한 이유다.

현대차는 더 뉴 그랜저의 외장 및 내장 디자인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변화를 적용해 기존 페이스리프트 모델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움을 구현했다. ⓒ 현대자동차
플레오스 커넥트는 차량을 이동수단이 아닌 일상과 연결된 스마트 디바이스로 확장하려는 현대차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소비자가 차 안에서 경험하는 화면, 연결성, 편의기능이 신차 체감도를 좌우하는 요소로 커진 만큼, 더 뉴 그랜저 역시 이 부분을 상품성 개선의 중심에 뒀다.
새롭게 도입된 '스마트 비전 루프'도 같은 흐름이다. 스마트 비전 루프는 선택 가능한 캘리그래피 트림 기준 12.4%의 선택률을 기록했다. 절대적인 비중이 압도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감성·편의 기술에 대한 고객 반응이 확인됐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더 뉴 그랜저의 초기 흥행은 세 가지 흐름이 맞물린 결과다. 그랜저라는 이름이 가진 잔존 가치, 상위 트림을 중심으로 한 고급 수요, 페이스리프트 모델에 신차감을 부여한 디지털 경험이다.
SUV 중심의 시장 흐름이 뚜렷해졌지만, 모든 소비자가 같은 기준으로 차를 고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소비자에게는 여전히 정숙하고 편안한 세단이 필요하고, 또 어떤 소비자에게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넘어가기 전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고급차가 필요하다.
더 뉴 그랜저의 첫날 1만277대 계약은 그 틈을 보여준다. 세단 시장 전체가 과거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그랜저만큼은 아직 국내 시장에서 분명한 이유를 가진 선택지로 남아 있다. SUV 쏠림 속에서도 그랜저의 이름값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시킨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