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민족시인 김소월, 그는 32살에 죽었다. 그의 시 진달래꽃은 1924년, 그의 나이 스물세 살에 발표됐다.(개벽25호)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관동대지진과 소월의 트라우마
김소월, 본명은 김정식이다. 190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34년 구성에서 서른 두 해만 살고 사망했다.
아버지는 김성도, 그는 어느날 음식을 싸서 말에 싣고 친척집으로 향하던 중 정주와 곽산 사이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을 만났다. 시비 끝에 음식을 모두 빼앗긴 것도 모자라 죽을 만치 몰매를 맞았다. 그후 음식을 먹으려 하지 않는 등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고, 사람이 나타나면 방구석에 몸을 웅크리며 피하는 시늉을 하는 등 심한 정신병을 앓았다.
소월은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했다. 사립 남산학교를 거쳐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오산학교 중학부에 재학 중 3.1운동이 터져 학교가 폐교되자, 배재고에 편입, 졸업했다. 그의 친인척들은 그의 천재성을 보고 한 두 푼씩 모아 1923년 초 일본의 최고 명문 동경대 상대에 진학을 시켰다.
그가 청운의 꿈을 안고 매진하던 그 해 가을, 정확히 1923년 9월1일 11시58분, 7.9~8.3도의 대지진이 간토지방(도쿄포함 1도6현)을 초토화 시켜 10만 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이었던 도시는 아수라장이 됐다.
일본 군부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인, 중국인,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우물에 독을 탔고, 흉악범죄까지 저지른다며 분노한 민심을 자극하자, 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고, 결국 15엔의 발음을 '쥬'가 아닌 '추'로 발음한 6천6백여 명이 잔인하게 살해됐다. 이때 김소월도 그 곳에 있었으나 간신이 몸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곳에서 당하고 본 일들로 외상성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그 즈음에 채란을 만났다.
◆동변상련의 벗 채란
영변에 온 진달래꽃 같은 진주 기생 채란, 그녀는 열아홉 살로 소월과는 두세 살 아래였다. 일제강점기 논개의 후예로 산홍, 승이교, 매화와 채란이 꼽히는데, 그 채란이다. 그녀의 운명 또한 기구했다. 아버지가 정신병으로 행방불명 된 집안은 풍지박산이 나고, 급기야 그녀의 어머니는 호구지책으로 13살짜리 딸을 전라도 행상에게 팔아 넘겼다.
행상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다 급기야는 남으로 홍콩, 북으로 다이렌, 텐진에 이르렀고, 기구한 운명은 어찌어찌 평안북도 영변 땅에 와 소월을 만났다. 둘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같은 상처가 있는 동병상련의 벗임을 첫 눈에 알아봤고, 불타는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채란은 기생의 몸이니 언제 곁을 떠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당장 내일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채란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떠날 것을 염려한 소월이 쓴 시가 '진달래꽃'이다. 만남은 단지 두 열흘(20일)뿐이였다고... 그 짧은 만남에 그녀가 없는 앞날을 걱정했던 시인의 마음은 황폐한 상태였다.
어린 여인을 만나는 희망속에서 헤어질 것을 못내 미리 걱정하는 절망의 마음,즉 양가감정(兩價感情)에 시달리고 있었다. 양가감정의 시적 관점은 한가지 상황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서로 상반됨에도 본인의 전체의식을 동시에 뒤흔들 만큼 강력하게 표현되는 상황이다.
정신병에 시달리던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부친의 망가진 모습을 경멸하는 이런 분열증은 진달래꽃 외에도 그의 시 △애증 △미련 △결정장애 등에서 나타난다고 공석진 시인은 말한다. (2026년 블로그. '김소월에게 이별은 가혹한 일이었다'에서)
또한 그는 가난했다. 할아버지의 광산업이 망하자, 처갓집이 있는 구성으로 돌아와 동아일보 지국를 운영했으나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았고 삶은 몹시 궁핍했다.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도 그의 스승 김억의 돈으로 출간할 정도였다. 그는 죽기 얼마 전 그의 부인 홍단실에게 "참 살아가기 어럽구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래저래 삶이 힘들었던 시인 김소월, 그에 대해 오산학교 시절 스승 김억은 소월을 일컬어 '냉정하고 검은 낙망'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우울, 음울, 절망의 가운데 심연에서 품어져 나오는 냉기 같은 냉정한 속내가 있었다는 얘기다. 시인 김장환도 소월에 관하여 절망까지도 긍정하고 희망까지도 부정하는 양가감정, 즉 동전의 양면같은 그의 의식을 안타까워했다.
◆편지로 보는 애달픈 마음 한 켠
김억은 소월 사후 '기억에 남는 제자의 면영'이란 글을 써 그와의 기억을 남겼다. 소월이 죽기 며칠 전 그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 민족시인 소월의 아픈 마음 한 켠을 잠시 구경해 봄도 좋을 듯하다.
창을 열어 놓아두면 불길도 없는 등잔은 나비가 건들이고 뜰 앞 그늘진 데서는 들우래가 밤을 새우는 철입니다. 개구리도 알을 까는 철입니다. 밤은 점점 깊어 갑니다. 식구도 없이 느렁찬 집에는 어린아기 잠들은 숨소리도 하염없는 슬픔만을 말하는 듯합니다.
근래에는 별로 보지도 아니하는 안두(案頭)의 책 몇 권이 어수선한 제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중략) 차차로 서산에 날이 저무니 가던 길이 끝나는 듯한 느낌입니다. 사람은 다 이러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은 무엇이나 하여 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건들이면 구적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더래도 가라앉고 말기는 할 겁니다. |
1977년 발견된 그의 미발표 창작노트를 보면 집안가장으로서 고된 삶과 일제 치하에 대한 비판이 보이는 등 서정시인으로서 만이 아니라 현실적문제에 고민을 많이 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를 기른 숙모 계희영에 의하면 오산학교시절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일로 구성 경찰서에 자주 불려갔고, 동경에서 돌아온 후로는 지식인이였기에 요주의 인물로 주목되어 현실비판 작품들은 모두 빼앗겨 불태워졌고, 서정적인 시들만 남았다고 한다.
◆이 시대 소월의 흔적들
이 시대에도 소월의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어느 날 밤 채란이 처연한 목소리로 고향을 그리며 부른 '팔베개노래'는 소월이 채록해 '팔베개 노래조'란 민요시로 만들었다.
진주와 함양군 등에서는 소월과 채란의 이야기를 스토리 텔링한 연극 '팔베개노래'를 예술문화 행사로 올리고 있다. 가수 윤상은 '소월에게 묻기를' 작곡해 선보였고, 마야 또한 '진달래꽃'에 내용 일부를 추가해 대중가요로 만들어 불리우고 있다.
서른 두 해 살다간 김소월은 근현대사 대표적인 민족시인이다. 외국인 귀화시험에 시인에 대한 딱 한 가지 문제가 나온다.
진달래꽃을 쓴 대한민국 시인은 누구인지. '진달래꽃'은 전 국민 애송시 1위, 소월은 노래로 불려진 시가 가장 많은 시인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곡들은 진달래꽃을 비롯한 △먼 후일 △초혼 △못잊어 △그리워 △옛 이야기 △산유화 △부모 △엄마야 누나야 △개여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실버들 등이다.
우리나라 전체 가곡 7백여 곡 중 20%정도인 140여 곡이 그의 시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통계도 있다. 교과서에 맨 처음 시가 등재된 시인이기도 하다. (소월의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