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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규의 AI 컨텍스터 선언⑤] AI 요약의 시대, 컨텍스터만이 나아간다

 

최홍규 EBS 연구위원 | press@newsprime.co.kr | 2026.04.30 09:36:26
[프라임경제] 시험을 앞두고 교과서 전체를 인공지능(AI)으로 요약한 학생이 있다. 요점만 뽑은 열 페이지가 화면에 떠 있다. 그런데 시험지를 받아 든 순간 손이 멈춘다. 요약본에 없는 맥락이 문제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요약은 완벽했다. 이해는 없었다.

요약은 빠르다. AI가 있으면 더 빠르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요약은 정보의 부피를 줄이는 일이고, 이해는 그 정보를 내 판단의 좌표 위에 올려놓는 일이다. 이 둘은 다른 행위다. 

필자는 이 차이를 기준으로 AI 시대의 사용자를 둘로 구분해왔다. AI가 대신 수행하는 요약·정리에 머무는 '텍스터(Texter)'와, 그것을 발판 삼아 맥락과 판단을 스스로 구성하는 '컨텍스터(Contexter)'다(자세한 개념은 이 연재의 앞선 칼럼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미 AI 자체가 텍스터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 할 자리는 하나다. 컨텍스터다.

AI의 역사를 직접 걸어온 당사자도 같은 지점을 짚는다. 브라운 대학교 컴퓨터과학 교수였던 유진 차니악(Eugene Charniak)은 1967년 AI 연구에 입문해 이 분야의 주요 전환점들을 직접 목격한 1세대 연구자다. 2023년 세상을 떠난 그가 남긴 유작 『AI와 나: 인공지능의 지성사(AI & I: An Intellectual History of Artificial Intelligence)』는 AI 70년의 궤적을 한 권에 담는다. 책은 1956년 다트머스 대학교의 작은 학술 워크숍에서 출발해 △추론과 지식 표현 △불확실성 하의 추론 △체스 △컴퓨터 비전 △음성 인식 △언어 습득을 거쳐 딥러닝(심층학습)과 강화학습(바둑)으로 이어지는 AI의 발전사를 챕터마다 충실히 짚어간다. 

이 긴 여정 끝에 차니악이 내리는 결론은 논쟁적이지만 실증적이다. 규칙과 논리를 앞세운 고전 AI의 수십 년은 '거의 예외 없는 실패'였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을 규칙으로 쪼개어 기계에 입력하면 이해가 생길 것이라 믿었지만, 그 시도는 챕터마다 반복되는 실망으로 귀결됐다. 진짜 도약은 데이터로부터 스스로 배우는 딥러닝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시작됐다. 규칙의 반복으로는 이해에 닿을 수 없다는 AI 역사의 교훈은, 요약을 반복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실험실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허드슨 K. 에트킨(Hudson K. Etkin) 등의 연구팀이 2025년 국제학술지 『Frontiers in Education(프런티어스 인 에듀케이션)』에 발표한 논문 「표준화된 지문의 독해에 대한 GPT 기반 도구의 차별적 효과(Differential effects of GPT-based tools on comprehension of standardized passages)」는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준다. 

195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AI 생성 요약 △AI 아웃라인 △문답형 튜터 챗봇 △소크라테스식 대화 챗봇 등 네 가지 GPT 기반 도구의 독해력 영향을 측정한 이 무작위 교차 실험에서 AI 요약 도구를 사용한 상위 독해자 그룹의 정답률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은 집단(82.5%)보다 오히려 낮은 66.5%로 떨어졌다. AI 요약이 독해 능력이 낮은 학생에게는 도움이 됐지만, 이미 깊이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이해를 오히려 방해한 것이다.

왜 그럴까. 요약은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버린다. 그 버려진 것이 바로 맥락이다. 숙련된 독자는 원문을 읽으며 논리의 흐름, 증거와 주장 사이의 긴장, 필자의 관점을 동시에 포착한다. AI 요약은 이 복잡한 과정을 대신하는 순간, 인간이 스스로 구성해야 할 이해의 구조를 가로채버린다. 결과물은 매끄럽지만 속이 비어 있다. 텍스터는 그 매끄러움을 이해로 착각한다. 컨텍스터는 그 매끄러움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다.

연구 현장에서 최근 들리는 얘기다. 연구자가 AI로 긴 논문을 요약하고 나서 '다 봤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가 왜 하필 이 방법론을 선택했는가'라고 물으면 말문이 막힌다. 그 판단은 요약본에 담기지 않는다. 저자가 수십 쪽에 걸쳐 쌓아올린 논증의 결을 따라가야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은 전달됐지만, 이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반대로 컨텍스터는 요약을 읽은 뒤 원문의 어느 지점을 더 파야 할지를 안다. 요약은 지도의 축척을 줄인 것이지, 지형 자체가 아니다. 축척을 줄인 지도로 길을 찾을 수는 있어도, 그 지형 위에서 살 수는 없다.

이해는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다. 요약본을 손에 쥔 채 '알겠다'고 멈추는 순간 이해는 닫힌다. 반면 요약을 읽고 나서 '그런데 왜?'를 하나라도 더 묻는 사람에게 이해는 열린다. AI가 요약의 속도를 무한히 높일수록 그 속도 위에서 스스로 질문을 만드는 힘은 더욱 희소해진다. 컨텍스터의 가치는 바로 거기서 생긴다.

요약은 읽는 게 아니다. 이해를 위한 입장권이다. 그 입장권을 손에 쥐고 공연장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텍스터다. 컨텍스터는 그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AI가 요약을 무한히 만들어낼수록 그 요약을 뚫고 들어가 진짜 의미를 길어 올리는 능력은 더욱 희귀해진다. 희귀한 것이 가치 있다. 오늘 당신이 AI로 요약한 정보 하나를 꺼내보라. 거기서 빠진 맥락은 무엇인가. 그것을 되살리는 순간, 요약은 비로소 이해가 된다.

최홍규 EBS 연구위원 / 미디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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