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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의 두 번째 역할…'V2G' 상용화 글로벌 경쟁

단순 충전에서 '전력 자원'으로…국내서는 현대차그룹 실증 선도

노병우 기자 | rbu@newsprime.co.kr | 2026.04.22 10:23:53
[프라임경제] 전기차는 더 이상 전기를 소비하는 이동수단에만 정의되지 않는다. 전력망과 연결돼 전기를 저장하고 필요할 때 다시 공급하는 '에너지 자산'으로 역할이 확장되고 있다. 

최근 글로벌 주요국이 'V2G(Vehicle to Grid)' 상용화에 속도를 내는 흐름은, 전기차 시장의 성장 국면을 넘어 에너지 시스템 자체가 재편되는 과정이다. 여기에 중동 지역 긴장 고조 등으로 에너지 공급 불안이 다시 부각되면서, 전기차를 전력 인프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은 단순 기술 실험을 넘어 전략적 선택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 변화의 출발점은 재생에너지 확대다. 태양광과 풍력은 생산량 변동성이 크다. 낮에는 전력이 남고, 저녁에는 부족해지는 구조가 반복된다. 기존 전력망만으로는 이 간극을 효율적으로 흡수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전기차가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배터리를 통해 잉여 전력을 저장하고, 수요가 몰리는 시간대에는 다시 전력망으로 보내는 방식이다. 전기차가 '이동수단'에서 '분산형 저장 자원'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참여 동기도 함께 설계되고 있다. V2G는 단순히 기술이 구현된다고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다. 전력 거래에 참여하는 개인의 유인이 전제돼야 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차량을 일정 시간 이상 충전기에 연결해두는 것만으로도 충전요금을 감면하거나, 전력 공급에 따른 수익을 배분하는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전기차 소유주가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전력 공급자로 전환되는 구조다.

현대차그룹의 제주도 V2G 실증 서비스 현장에서 전기차들이 양방향 충전기에 연결돼 실제 충·방전을 통해 전력을 주고 받고 있다. ⓒ 현대자동차그룹


국가별 접근 방식은 이미 갈라져 있다. 영국은 V2G를 하나의 서비스로 묶어 시장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 집중하고 있다. 에너지 기업이 차량 리스와 충전기, 요금제를 통합해 제공하면서 이용자는 별도의 거래 절차 없이 충전만으로 전력 거래에 참여할 수 있다. 복잡한 시장 구조를 단순화해 초기 수요를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네덜란드는 도시 단위로 접근한다. 위트레흐트에서는 전기차, 충전 인프라, 태양광 발전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어 실증 범위를 지역 단위로 확장하고 있다. 낮 동안 발생하는 잉여 전력을 전기차에 저장했다가 필요 시 다시 공급하는 구조를 통해 재생에너지의 불균형을 흡수한다. 개별 차량이 아닌 '도시 전체의 에너지 흐름' 속에서 전기차를 배치하는 방식이다.

미국과 일본은 또 다른 방향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V2G가 재난 대응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 산불과 폭염, 노후 전력망 문제로 정전 리스크가 반복되는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전기차를 활용한 전력 복구 실험이 진행 중이고, 일본 역시 동일본 대지진 이후 전기차를 비상 전력원으로 활용하는 체계를 강화해왔다. 

실제 재난상황에서 전기차가 피난소와 병원에 전력을 공급하는 사례가 이어지면서, 전기차의 역할은 이동수단을 넘어 재난 대응 전력 인프라로 확장되고 있다.

이처럼 국가별 전략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전기차를 단순한 수송 수단이 아닌 전력망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다. V2G는 새로운 기능의 추가가 아니라 전력 시스템 구조를 바꾸는 방식에 가깝다.

국내 상황은 다른 궤도에 있다. 기술 검증은 이미 시작됐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제주에서 전기차를 활용한 V2G 실증을 진행하며 충전 인프라와 전력망 연계 안정성을 점검하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현대차 아이오닉 9, 기아 EV9 등 양방향 충전이 가능한 전기차를 투입해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환경에서 잉여 전력 저장과 공급이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하는 단계다.

단순 실증을 넘어, 완성차 업체가 전력망 운영 구조 안으로 들어오는 시도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차량은 이동수단에 머물지 않고 전력 흐름을 조절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완성차 기업은 충전과 판매를 넘어 에너지 활용 구조까지 설계하는 주체로 역할이 확장된다. 전기차 플랫폼과 충전 기술을 기반으로 전력망과의 연결성을 확보하려는 흐름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전기차가 전력을 공급하더라도 이를 시장에서 어떻게 인정하고 보상할지에 대한 기준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전력 거래 주체로서 전기차의 지위도 명확하지 않다. 누가 전력을 판매할 수 있는지, 그 대가는 어떻게 산정되는지에 대한 틀이 부재한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기술은 움직이고 있지만 시장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V2G 확산 속도를 좌우하는 변수는 기술이 아니라 제도에 가까워졌다. 정부가 민·관 협의체를 통해 요금 체계와 정산 방식, 법적 기준 마련에 착수한 것도 이런 배경이다. 

다만 글로벌 흐름과 비교하면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해외가 서비스 모델과 시장 구조를 설계하는 단계라면, 국내는 제도 정의부터 다시 짜야 하는 상황이다.

이 변화가 본격화될 경우 산업 경계 역시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전기차는 전력을 소비하는 제품이 아니라 전력 거래에 참여하는 자산으로 재정의된다. 개인은 차량을 통해 전력을 공급하는 주체가 되고, 완성차 기업은 에너지 사업과 연결될 여지를 확보하게 된다. 자동차 산업이 전력 산업과 맞닿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V2G는 새로운 기능 하나를 추가하는 기술이 아니다. 전기차의 존재 이유를 확장하는 흐름에 가깝다. 충전에서 끝나던 관계가 거래로 이어지는 순간, 전기차는 더 이상 도로 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력망 안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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