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현대자동차그룹이 2026년부터 2030년까지 향후 5년간 국내에 총 125조2000억원을 투자한다. 단일 기업의 국내 투자 규모로는 사상 최대치다. 직전 5년(2021~2025년) 동안의 89조1000억원 대비 36조1000억원 늘어난 수준이며, 연평균 25조원을 웃도는 투자액이다.
이런 초대형 투자 결정은 단순한 생산라인 확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글로벌 모빌리티 혁신 허브로 끌어올리는 전략적 선언에 가깝다. 현대차그룹은 "인공지능(AI)·로봇 산업 육성, 그린 에너지 생태계 발전 그리고 국내 모빌리티 생산 중심지화"를 핵심 목표로 제시했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투자 중 50조5000억원을 '미래 신사업'에 배정했다. AI,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 자율주행, 로보틱스, 전동화, 수소 에너지 등 미래 모빌리티 생태계를 구성할 핵심 기술이 여기에 포함된다.
핵심은 피지컬 AI(Physical AI)다. 그룹은 로봇과 자율주행, AI 제조 시스템 등 물리적 행동 기반 AI 기술을 실증·상용화하기 위해 AI 데이터센터와 AI 애플리케이션 센터를 설립한다. PB(페타바이트)급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이 센터는 로봇의 행동 데이터와 자율주행 차량의 학습 데이터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인프라다.
또 '현대차그룹 피지컬 AI 애플리케이션 센터를 통해 로봇의 완성도·안전성·신뢰성 검증을 위한 테스트 플랫폼을 구축하고, 산업현장 적용 전 단계에서 로봇의 실증과 검증이 이뤄지는 구조를 만든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 주재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여기에 '로봇 완성품 제조 및 파운드리 공장'을 신설해 단순 로봇 생산을 넘어 중소 협력사의 로봇 부품 위탁생산(Foundry) 생태계까지 확장한다. 자동차 부품 협력사가 로봇 산업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산업 구조 자체를 자동차에서 'AI 기반 제조산업'으로 진화시키겠다는 구상이다.
현대차그룹은 AI와 함께 그린 수소 에너지를 또 다른 성장축으로 설정했다. 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서남권에 1GW 규모의 PEM 수전해 플랜트를 건설하고, 주변에 수소 출하센터 및 충전소를 포함한 인프라망을 구축한다.
이는 단순한 친환경 설비가 아니라 수소연료전지 부품·수전해 장치 제조 등 수소 밸류체인의 국내 자립화를 목표로 한 전략적 투자다. 나아가 PEM 수전해기와 연료전지 핵심부품을 글로벌 수출산업으로 키워 'K-수소산업'의 해외시장 확장을 노린다.
또 현대차그룹은 정부 및 지자체와 협력해 AI+수소+V2X(차량-인프라 통신)을 융합한 수소 AI 신도시’ 조성도 검토 중이다. 울산·전주·광주·창원 등 전통 제조도시를 중심으로 AI 기반 수소 인프라가 결합된 스마트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또 투자금 125조원 중 신사업 50조5000억원을 제외하고는 △R&D 38조5000억원 △경상투자 36조2000억원이 투입된다.
R&D는 모빌리티 산업 경쟁력의 지속 강화가 목표다. 후륜 기반 하이브리드 시스템, 차세대 파워트레인, 900㎞ 이상 주행 가능한 EREV(Extended Range EV) 등 기술 고도화가 핵심이다.
배터리 내재화 투자를 강화해 안전성과 에너지 밀도를 개선하고 배터리 생산의 국산화율을 높인다. 차세대 수소연료전지 시스템, 수소버스·트럭 개발 등에서도 글로벌 리더십을 공고히 할 예정이다.
경상투자는 미래 제조 환경 변화 대응에 초점이 맞춰졌다. 울산 EV 전용공장, 화성 PBV 공장, 수소연료전지 신공장, 충남 당진 현대제철 LNG 발전소 등 전국 생산기반을 효율화한다. 특히 현대차그룹 GBC(Global Business Complex)는 완공 시 '서울 도심 제조 혁신 거점'이자 대한민국 랜드마크로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투자에는 한 가지 더 큰 의미가 있다. 한미 자동차 관세 15% 시대에 맞선 산업 생태계 복원 전략이라는 점이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미국 수출 과정에서 발생한 1차 협력사의 대미 관세를 전액 지원하기로 했다. 현대차·기아에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사가 미국 생산법인(HMGMA, 앨라배마·조지아 공장 등)에 공급할 때 부담하는 관세를 매입가격에 반영해 직접 보전하는 구조다.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전경. ⓒ 현대자동차그룹
이 조치는 한미 통상 환경 변화에 따른 유동성 리스크 완화를 위한 긴급 대응책이다. 현대차그룹은 "협력사의 운영자금 확보와 경영 안정화를 지원해 산업 생태계 전반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또 1차 협력사뿐 아니라 2·3차 중소기업 5000여 곳을 포괄하는 상생협력 프로그램도 확대한다. 원자재 구매 지원, 수출 판로 개척, ESG·스마트공장 구축 등 전 주기 경쟁력 강화가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현대차그룹의 이번 투자에는 한국을 글로벌 생산 중추이자 수출 허브로 강화하겠다는 목표가 깔려 있다. 지난해 218만대였던 국내 완성차 수출을 2030년 247만대로, 그중 전동화 차량은 69만대에서 176만 대(2.5배)로 확대할 계획이다.
국내 전기차 전용공장을 글로벌 마더팩토리로 육성해 해외 조립 및 수출의 중심축으로 삼고, 수출 지역을 다변화함으로써 IRA·FTA 등 통상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
◆단순 확장이 아닌 산업 질서 재편 선언
이번 125조2000억원 투자는 단순한 생산능력 확장이 아니라 한국 자동차산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려는 시도다. 현대차그룹이 제시한 방향은 양적 확대가 아닌 질적 전환이다.
우선 제조의 AI화가 본격화되며, AI 데이터센터와 로봇 파운드리를 통해 생산 공정, 품질 관리, 물류 전반이 지능화되는 구조로 바뀐다. 이로써 자동차 제조는 단순한 조립 산업이 아니라, 데이터 기반의 스마트 산업으로 변모한다.
산업 간 경계도 허물어진다. 자동차, 로봇, 수소, 전력, 인프라가 하나의 기술 플랫폼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모빌리티를 중심으로 한 융합 생태계가 구축된다. 이는 단순한 신사업 확장이 아니라 전통 제조업과 첨단 산업 간의 경계를 무너뜨려 새로운 산업 구조를 창출하는 흐름이다.
이와 함께 협력사 중심의 상생 생태계도 한층 고도화된다. 현대차그룹이 1차 협력사의 대미 관세를 전액 보전하고 스마트 공장 전환과 ESG 경영 지원을 확대함으로써, 공급망 전반의 회복탄력성이 강화된다. 이는 완성차 단독 경쟁이 아닌, 생태계 전체의 경쟁력으로 산업 구조를 바꾸는 움직임이다.
마지막으로 수출 체질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국내 공장을 글로벌 마더팩토리로 삼아 고부가가치 전동화 차량의 수출 비중을 기하급수적으로 확대하는 전략이 본격화되며, 한국은 단순한 생산 기지를 넘어 글로벌 전동화 공급망의 핵심 거점으로 도약하고 있다.
결국 이번 투자는 공장을 늘리는 사업계획이 아니라 한국 모빌리티 산업 전반의 구조적 업그레이드를 의미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역대 최대 규모의 중장기 투자와 끊임없는 혁신으로 대한민국 경제 활력 제고에 기여하겠다"며 "협력사 관세 지원과 상생 프로그램 확대를 통해 국내 자동차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