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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270년을 건넌 신뢰의 물결…'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

한양에서 에도까지, 조선통신사 대장정과 문화교류를 만나다

박대연 기자 | pdy@newsprime.co.kr | 2025.04.25 11:22:01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 특별전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이 열리는 서울역사박물관. = 박대연 기자


[프라임경제]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의 전시장 안은 300년 전 조선통신사의 숨결로 가득 차 있다. 사절단이 품에 안은 국서, 낯선 땅에서 건넨 시와 그림,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던 존중과 신뢰. 이 특별전은 단순한 과거의 외교사를 넘어, 사람과 사람이 사귄 시간과 감정의 기록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열린 이번 전시는 조선통신사의 유산을 집대성한 역대 최대 규모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포함한 128점의 유물을 한자리에 모았다. 국내외 18개 기관이 소장한 이 유물 중 20여점은 최초로 일반에 공개된다.

무엇보다 전시는 유물 그 자체보다 유물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 '장 줄리앙 푸스'와 협업한 몰입형 영상이 상영되며 관람객의 감정을 깊은 여운으로 이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총 1156㎡ 규모로 박물관 개관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전시다. = 박대연 기자


◆ 1부 : 국가 외교 사절단, 통신사…국교 재개의 고뇌, 평화를 위한 선택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통신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패널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믿음을 통하는 사절', 국서를 품고 바다를 건너 신뢰의 메시지를 전하던 조선시대 외교 사절단의 이야기다.

조선통신사는 지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일본 막부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파견된 공식 외교 사절단이다. 단순한 외교 교섭을 넘어 신뢰를 매개로 한 평화의 사절이자 문화교류의 전령이었다.

그러나 이 교류는 단순한 외교적 절차로 시작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끊기고 전란의 상처가 깊게 남은 상황에서, 조선은 국교 재개를 위한 치열한 고민에 빠진다. 이 고뇌의 시간은 사명대사 유묵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을 앞두고 남긴 붓글씨 한 자 한 자에서 사명대사의 결의와 긴장이 전해진다.

포로로 억류된 강항이 일본에서 남긴 '수은간양록', 전후 첫 공식 사절단의 발자취를 담은 '경칠송해사록'은 전쟁이 남긴 상처와 그 속에서 다시 신의를 모색하려 했던 조선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 치열한 외교적 선택의 과정을 영상으로 풀어낸 장 줄리앙 푸스의 몰입형 영상이 1부를 마무리한다. 깊은 겨울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길을 나서는 관료들의 모습. 조용히 흐르는 영상 속에서, 평화란 얼마나 어려운 결심의 결과였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탐적사로 전후 교섭에 활약한 사명대사의 초상화 및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을 앞두고 쓴 시. = 박대연 기자


◆ 2부 : 평화가 흐르는 길…1만리 대장정, 평화가 흐르는 길

두 번째 공간에 들어서면 왕복 1만리, 한양에서 에도까지 거대한 사절단의 대장정이 펼쳐진다. 이 여정은 단순한 외교 사절단의 이동이 아닌 문화와 신뢰가 함께 오가는 상징적인 길이었다.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사로승구도권'이 눈길을 끈다. 통신사 일행의 행렬과 여정을 30장면으로 세밀하게 그린 이 작품은 그 긴 길의 숨결을 생생하게 전한다.

이후론 웅장한 여정을 나타낸 두 번째 장 줄리앙 푸스의 몰입형 영상이 이어진다. 거친 파도, 물결 위를 잇는 배다리, 발걸음을 재촉하던 사행단의 모습이 감각적인 이미지로 재구성되어 관람객을 다시 그 길 위에 세운다.

2부 마지막에는 에도 도착 후 국왕의 국서를 도쿠가와 쇼군에게 전달하는 장면을 화려하게 그린 '통신사환대도병풍', 그리고 그 의례에서 입었던 복장을 정밀하게 묘사한 '신미통신사정장복식도권'은 사절단의 품격과 위엄을 오롯이 보여준다.

통신사환대도병풍(가노 마스노부·1655·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교토시 지정문화재·센뉴지). = 박대연 기자


◆ 3부 : 바다를 건너 흐르는 문화…문화로 건넌 마음, 예술로 남은 교류의 흔적

세 번째 공간은 조선과 일본이 주고받은 문화 교류의 흔적을 따라간다. 정치적 외교를 넘어 예술과 일상, 민중 속으로 번져간 만남의 결과물이다.

특히 일본 항해 중 시를 써내려간 역관 이언진의 '송목관시독', 문사 남옥과 일본 문인들의 교류를 기록한 시집 '일관창수', 도자기 주문 장부 '제방어호지어소물어주문류'는 사절단이 단순한 외교인이 아니라 예술가이자 문화 전달자였음을 보여준다.

문화 교류는 민간의 축제와 신앙 속에서도 살아 있었다. 일본 에도의 마쓰리에서는 통신사 가장 행렬이 등장했고, 종교적 봉헌물인 '선단 에마(繪馬)'에는 사절단의 행렬이 그려졌다. 이번 전시에서 국내 첫 공개된 이 '에마'는 교류가 민중의 일상과 신앙까지 깊숙이 스며들었음을 말해준다.

전시회의 마지막은 장 줄리앙 푸스의 세 번째 영상이 마무리한다. 시와 필담, 한문을 사용한 문사들의 의사소통 장면이 영상 속에서 잔잔하게 물결친다. 영상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시와 마음으로 닿았던 그들의 교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조용히 전한다.

배 형식으로 구성한 3부 '바다를 건너 흐르는 문화'. = 박대연 기자


이번 전시는 25일부터 6월29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다. 전시는 유물 보존을 위해 1회차(4월25일~5월25일)와 2회차(5월27일~6월29일)로 나눠 교체 전시한다.

전시기간 동안 다양한 행사도 개최한다. 가정의 달을 맞아 어린이와 가족 단위 관람객을 위한 체험형 콘텐츠도 진행한다. '통신사와 함께, 한양에서 에도까지'를 주제로 한 보드게임형 체험 전시, 유물 퀴즈 존, 학급단체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의 관장은 "이번 전시는 박물관 개관 이래 최대 규모이자, 통신사 관련 전시 중 가장 많은 유물이 소개되는 자리"라며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와 교류의 흔적 속에서 '마음의 사귐'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270년 동안 12차례나 이어졌던 조선통신사. 그들이 나눈 것은 국서와 예술만이 아니었다. 외교가 사람을 만나고, 문화가 울림이 되어 여운처럼 물결쳤던 시간들.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전은 그 물결의 일부가 되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신뢰와 평화, 우리는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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