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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의칙 말고"…기아차 항소좌표 '신의칙상 부수의무' 클릭?

2013년 판례 사실상 '사정변경의 원칙'…당장 문닫을 회사에게나 온정 가능성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17.09.01 14:58:28

[프라임경제] #1. "(자동차)산업 특성상 야근, 잔업이 많은데 통상임금이 확대될 경우 수당이 50%가량 늘어나 인건비 부담이 너무 커진다. 기아차가 50% 오르면 현대차 노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8월22일 기자들을 만난 박한우 기아차 사장의 발언) 

#2. "임금협상 당시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유를 들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가산해 지급을 구함으로써 사용자에게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면, 이는 정의와 형평 관념에 비추어 신의에 반하고 용인될 수 없다." (2013년 12월 대법원의 갑을오토텍 통상임금 판결) 

8월31일 기아차 통상임금 1심 판결이 나온 가운데, 평형과 정의를 다룬 두 발언이 새삼 오버랩 되고 있다. 1심 판결만 놓고 본다면 2013년에 대법원이 다소 불확실하게 언급하고 넘어간 통상임금 판단상 신의칙의 범위와 기준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이렇게 자동차업계 주변을 맴도는 형평성, 그리고 신의칙 문제를 놓고 볼 때, 1심 판결은 단추를 잘못 꿴 상황에서 그 아랫줄을 가지런히 채우는 게 아닌지 새 의구심 또한 제기된다.

바꿔 말하면 지금 1심 판결에 좌절 중인 기아차 회사 측이 마냥 낙담만 할 것이냐는 태세 전환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2013년 판결에서 언급된 신의칙을 나름대로 해석, 적용해 달라고 주장했고, 일단 이 논리는 깨졌지만 다시 신의칙 주장을 좀 다른 각도로 변경·확장하는 쪽으로 논점의 변경을 해 볼 필요가 있는 것.

신의칙의 여러 파생 이슈, 2013년에는 그 중에 사정변경이었다?

현재 통상임금 문제에서 거론되는 신의칙은 바로 저 박 사장 발언과 같은 '형평성 문제'에 맞춰져 있다. 최고 법원의 표현을 민간기업 관계자의 넋두리와 같은 수준에서 평가하는 자체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남(옆 회사) 눈치도 좀 봐 달라, 회사가 쓰러질지 모르니 그 사정도 고려해 달라는 본질은 같다. '일을 처리할 때 그 여파를 생각해 하자'는 것이다.

더 명확히 해 보자. 위 판결문의 바로 앞 부분 언급을 가져와 살펴 보자. '임금협상 당시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유' 즉 지나친 소송이 제기될 수 있는 배경은 이렇다.

우리나라는 본래적 의미의 상여금 즉 경영 성적이 좋다든지 할 때 부정기적으로 주는 보너스 관념이 아니라, 상여금 명패를 단 고정급 지급 경향이 강하다. 기업체마다 그 내용과 계약 체결의 구체적 사정이 달라, 성과급=통상임금이라고 당연히 표현하기도 어렵다.

이런 실태는 바로 기본급을 적게 주되(통상임금이 커지면 수당도 늘어날 수 있으므로), 성과급을 많이 줘 어느 정도 총계 수준을 맞춰주는 관행이 굳어져 왔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위의 #2. 신의칙 언급 내용의 바로 전에, 언급한 부분이 바로 이 관행이다. "노사합의에서 정기상여금은 그 자체로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아니한다고 오인한 나머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 산정 기준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전제로 임금수준을 정한 경우…"다.

사실 이렇게 보면 그 이하 단락의 '신의칙'이란, 신의칙 그 자체를 언급한 것이라기 보다는 신의칙의 한 파생형인 '사정변경의 원칙'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막연히 "신의칙 인정해 달라" 읍소 안 먹힌 이유

대법원 스스로 2013년 갑을오토텍 판결에서 지적하듯, "통상임금 내용에 무엇이 들어가는지는 노사 합의로 이를 배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야말로 이는 노동계약의 본질적이고 고정적인 대목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주고받아야 할 돈(통상임금에 상여금을 넣어서 수당 등 여러 문제를 계산해야 하고, 과거 관행보다 돈을 더 줘야 한다는 것)이며, 이 정의를 세우는 것은 근로자 개인이 벌어서 먹고 사는 이슈 외에 노동정의 실현이라는 공공적 계약 해석의 측면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렇게까지 다시 들춰내고 새로 소송을 진행하면 기업이 무너질 수도 있고, 그런 경우에는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사자 합의에 의해서도 배제할 수 없는 성질의 돈이 지급 정지되고, 아예 청구권 자체가 소멸되는 경우가 우리 사법·사경제 영역에서 과연 얼마나 있는가.  

'전쟁이나 이에 준하는 경제위기 상황' 더 나아가 초고도의 인플레이션 등으로 채무 내용 자체를 조정하는 정도가 아닐까. 이런 경우 적용 논리는 신의칙 전체가 아니라 사정변경의 원칙이라고 해야 옳다.

그런 점에서 대법원이 말한 '회사 자체가 무너질 경우에까지 상여금의 통상임금 합산 청구를 받아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스스로 그런 인정 가능성을 0로 설정하고 하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우리나라 법원은 사정변경 원칙 인정에 대단히 인색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향후 통상임금 판단 시스템 변화로 한국 재계가 추가로 질 부담은 30조원에 달한다고 추산되나, 이런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사정변경의 원칙 논리다.

사정이 이러니 신의칙을 고려해 달라고만 '금과옥조'처럼 외친들, 수용되기가 어려울 것은 명약관화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2011년 소송 제기 전, 기아차 노조 해당 이슈 알았나 몰랐나? 

기아차는 신의칙 언급을 전면적으로 포기해야 할까. 신의칙에서는 사정변경의 원칙만 파생되는 것은 아니다. 2012년에 한 잡지에 발표된 정영진 박사의 '신의칙상의 부수적 주의의무에 관한 연구' 에 따르면, 신의칙은 법률행위를 해석해 그 내용을 확정하는 권리의 발생, 변경, 소멸 기능을 갖는다.

부수의무도 신의칙에서 파생된 의무 중 하나인데, 계약을 체결할 때 상대방에게 조건 등을 모두 꼼꼼하게 설명할 의무도 이 부수의무 중 하나로 거론된다.

기아차 노조 같은 강성 노동조직이 2011년 통상임금 소송을 제기하기 전까지 전혀 이런 문제와 논쟁거리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볼 여지는 없고, 이는 스스로 내용을 알고도 포기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계약의 수정(변경)에 해당하는 사정변경의 원칙에 기댈 것도 없이, 아예 계약의 창설 부분에 해당하는 부수의무(설명의무)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서로 덮고 넘어간 것으로 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 신의칙 위반은 위반이지만, 통상임금 소송을 제기하는 자체가 신의칙 위반이라는 새 주장을 기아차가 펼지 주목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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