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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 한국증시 110년 그 파동의 역사 <7> - 1927년 쇼와 금융공황으로 한일 증시 급락

주가맞히기대회 등 백방 노력에도 경취주 9원대까지 떨어져

임경오 기자 | iko@newsprime.co.kr | 2005.11.12 12:47:01

   

                   1894~1944년 일본주가지수 그래프. 쇼와공황이 발생했을 때 급락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에 기술했던대로 1920년에 문을 연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은 처음엔 지금의 서울 효자동에 문을 열었으나 장소가 협소하자 지금의 명동 구 증권거래소 자리인 900평 부지에 40만원을 들여 1년4개월만에 당시로는 3층짜리 최신식 건물을 지었고 1923년 1월4일 발회식후 새로이 출범했다.

이후 이 거래소는 56~79년 대한증권거래소 건물로 쓰이기도 했으며 올 6월엔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재 등록을 예고했으나 지난 9월 25일 건물소유주가 재개발을 위해 철거를 시도하다 시민단체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저지로 철거가 무산된 화제의 건물이었다.
 
아무튼 1920년엔 경기침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데다 명동시대가 열린지 불과 8개월만에 간토대지진이 발생하고 이어 4년후에는 일본에서 쇼와금융 공황까지 터지자 경취주를 비롯한 많은 주식들은 1921년과 같은 시세는 다시는 볼수 없었다.

간토대지진 영향 4년후 쇼와금융공황 발생

1927년의 쇼와금융공황으로 도쿄와 오사카증시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에 따라 당시 일본증시의 주가시세를 전보로 받은 후 그 시세에 따라 경취 주식들의 시세가 움직임으로써 두 나라의 시세가 사진찍듯 똑같다고 해서 ‘사진시세’라고 불렸던 경취에도 악영향을 미친 것은 당연했다.

일본의 1927년 쇼와금융공황은 지난주에 자세히 언급했던 1923년의 간토대지진이 근본원인이었다. 일본은행은 1923년 9월의 간토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많은 기업들의 부도를 막기 위해 긴급 구제 금융을 제공했다.

피해지역의 기업이 발행한 어음(=震災어음)을 재할인해 주기로 결정한 것인데 이 같은 조치는 지진 이후의 금융 시장 불안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지진과 아무 관계없는 상당수의 기업들이 이를 새로운 자금원으로 활용하는 폐해를 낳았다.

그 결과 지진 발생 3년이 지난 1926년 8월까지 2억엔 이상의 진재어음이 미결제 상태로 남게 되었는데 그것은 결제될 가망이 거의 없는 것들로 이는 일본은행이 예상한 당초 피해규모의 두 배를 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27년 1월 집권당인 겐세이카이(憲政會)는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미결제 진재어음을 정리하는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이 과정에서 당시 내각과 가까웠으며 대만무역을 통해 급성장한 신흥재벌 스즈키의 어음이 절반이 넘는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에 따라 야당의 반발을 초래했다. 결국 스즈키의 주거래은행인 대만은행은 스즈키를 더이상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엉뚱하게도 대만은행에 대한 예금 인출과 은행들의 콜자금 회수로 이어지면서 대만은행의 부실을 초래했다. 대만은행은 식민지 대만의 중앙은행으로서 대만은행의 파산은 일본에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초래할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일,식민지 대만은행 구제금융 거부 은행·기업 줄도산

따라서 대장성은 일본은행에 대만은행에 긴급자금을 공급해서 금융불안을 잠재울 것을 요청했다.당시 의회 회기가 끝난 시점이었으므로 재정부담이 따르는 이런 약속을 인가할 수 있는 기관은 추밀원 뿐이었다.

집권당 겐세이카이의 불간섭주의적 대 중국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던 추밀원은 집권 내각을 무너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고 4월 16일 손실보상 보장 요청을 부결했다. 

이에 같은 날 저녁 내각은 다음날 아침 터질 것이 분명한 금융공황의 책임을 지고 총사직했다. 사직한 겐세이카이 내각의 대장대신은 일본 은행 총재 및 재벌계 은행장들과 모임을 갖고 일본은행이 중심이 되어 대만은행을 살리기 위한 신디케이트를 구성하라고 종용했지만 은행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인 1927년 4월 17일 전국적 금융공황이 터졌다. 이날부터 은행들이 넘어지기 시작, 일본은행 열곳중 하나꼴로 쓰러졌으며 이에 따라 관련기업들도 줄도산을 이었다. 마치 1997~1998년 한국의 IMF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부실채권에 시달리고 있던 식민지 대만의 중앙은행이 쓰러지면 심각한 금융공황이 발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본은행이 구제금융을 거부한 것은 1925년부터 실시된 긴축통화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긴축통화정책은 금본위제도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아무튼 쇼와공황의 이같은 파장은 2년후에 발생하는 미국의 대공황기 금융공황과 비교될 만큼 심각한 것으로 일부는 1990년대 부동산 버블 붕괴로 초래된 금융위기와 버금가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 파시즘 대두 한국 병참기지화 필요

쇼와금융공황으로 파산한 것은 대부분 중소규모 은행들이며 이에 따라 중소기업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일본의 금융산업은 재벌은행 중심의 과점적 체제로 재편됐다.

   
               1929년 1월12일 일간신문에 실린 주가맞히기 당첨자 발표기사.
   
 최근 코스피지수와 코스닥지수 알아맞히기 이벤트.       일제시대의 주가맞히기와 비슷해 관심을 끌고있다.
일본에서는 이때부터 시장경제는 불안정하고 불공평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결국 1930년대 일본내에서 파시즘이 등장하는 배경이 됐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히토쓰바시대학 경제연구소,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일본내에 파시즘이 등장하면서 한국은 대륙진출을 위한 병참기지화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한국내에도 좀더 선진화된 자본시장이 필요함으로써 경취의 운명은 12년 흥망성쇠로 끝이 났다.

쇼와금융공황으로 일본증시가 폭락하자 사진시세였던 경취주식들은 역시 같이 폭락했다.

이무렵 동아일보는 경취주 시세등 주가지수 맞히기 대회를 열고 경취와 인취 양시장에서 지수를 정확히 맞히거나 근접하게 맞힌 사람들을 시상하기도 했을 정도로 증시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백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1929년엔 세계대공황까지 겹침으로써 경취주들은 좀처럼 반등을 하지 못하고 우하향하기만 했으며 1930년 11월엔 급기야 경취주가 주당 9.7원까지 폭락했다. 출범주가인 12원50전보다 22%나 더 떨어진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세계대공황 겹쳐 경취 그로기

1929년 10월24일 월요일 미국 뉴욕증시는 대폭락을 함으로써 세계 대공황의 서막이 열렸다. 1920년대 미국경제는 소득분배의 왜곡과 내구 소비재의 공급과잉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주식시작의 폭락은 개인투자자의 소득및 자산을 삭감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소비재의 공급과잉 문제가 표면화되고 급기야 인류역사에 전무후무한 대공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 공황은 국제적인 달러자금 흐름의 교란, 독일 영국의 생산 격감, 세계적인 농산물 가격 폭락, 세계무역의 쇠퇴등 연쇄적으로 파급되면서 1931년 5월엔 오스트리아 최대은행이 파산함으로써 유럽에 금융공황까지 초래했다.

세계대공황 당시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 “米國의 모라토리움 영향으로 東京 大阪(오사카) 경성등 각 주식시장은 금일 휴장하기로 되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세계대공황은 당시 개방체제를 취했던 일본경제와 증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경취의 끝없는 침체를 불렀다. 결국 경취는 1932년 문을 닫게 됨으로써 종언을 고하게 된다.

사실 경취가 문을 닫게 된 것은 쇼와공황이후 대두된 일제의 파시즘과도 관계있다.

1932년 경취·인취 합병 조선취인소 출범

1930년대 들어 일제는 만주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우리나라 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자금조달의 필요성도 커지게 됐다. 하지만 당시의 경취는 근거법령 미비로 증권자본 형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따르지 못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2% 부족한 셈이다.

일제는 이에 따라 침체상태에 있던 경취 대신 새로운 증권시장을 만들기로 하고 1931년 조선취인소령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결국 조선취인소령에 따라 1932년 1월1일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과 인천미두 취인소(한국증시 110년사 1~3편 참조)를 합병한 조선취인소가 개설됐다.

사실 양 거래소의 합병시도는 1925년부터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인천시민과 경취중매인등이 일제히 반대에 나서면서 수포로 돌아갔었다. 1925~1926년사이 신문에는 연일 합병반대 기사가 지면을 메우기도 했을 정도다.

아무튼 경성주식현물취인소는 증권시장(증권부)이 됐으며 인천미두취인소는 지점형태로 미두시장(기미부)이 됐다. 이로써 경성주식현물취인소는 12년만에, 인천미두취인소는 36년만에 그 이름은 사라지게 된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주신 분 = 증권연구가 위문복 (www.aha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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