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트
  • 메일
  • 스크랩
  • 글자크기
  • 크게
  • 작게

은행 터, 주인흥망 따라 얘깃거리로

명당 차지후 승승장구 對 좋은 터 잡고도 공적자금 '희비'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09.10.28 10:42:15

[프라임경제] 장사 잘되는 은행터는 따로 있을까?

치열한 영업 경쟁을 펼치고 있는 시중은행들 중에 좋은 터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이른바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명당과 은행 사운에 연관이 있는지 이야깃거리를 낳고 있다.

◆신한은행 터는 호조 능가하던 선혜청 별청 자리

1982년 창립 이래 큰 성장세를 보여 눈길을 끌고 있는 신한은행은 현재 남대문(숭례문) 서쪽인 서울 태평로 2가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신한은행 본점>  
신한은행 터는 조선시대 선혜청의 별청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혜청은 광해군 때 대동법이 도입되면서 대동법 관장 기구로 등장한 곳. 이후 물가조절과 진휼모곡 등 상평청 기능을 흡수했다. 점차 기능이 커져 호조를 오히려 능가하는 기구로 갑오경장 전까지 위세를 부렸던 기관이었다.

선혜청이 갑오경장으로 폐지된 후에도 이 선혜청 별청 자리에는 전환국이 설립돼 화폐 주조를 했다. 전통적으로 은행 거리인 명동에서 은행 점포 1개로 시작한 신한은행은 1986년 현재로 이사를 한 후에 사운이 욱일승천하고 있다.

◆오래 권세 누려온 외환은행 터, 외국계와도 인연

외환은행 본점은 서울 을지로 2가에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장악원(궁중음악 관장 기구)이 위치해 금융과는 별반 상관이 없었으나, 본격적인 일제 시대 개막을 앞두고 제국주의 토지 정책을 뒷받침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1909년 이곳에 들어서면서 자금 흐름줄의 중심선에 앉는 형국이 됐다.

광복 이후에는 내무부로 건물 주인이 바뀌었다가, 1977년부터 외환은행 본점으로 이용됐다.

1977년은 1차 오일쇼크가 세계 경제를 강타해 한국 경제 역시 함께 어렵던 시절이기도 하지만, 100억달러 수출 달성을 기록한 해이기도 하다.

   
  <사진=외환은행 본점 터는 동양척식회사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외국 식민 수탈 기관의 터를 물려받은 역사는 이후 외환위기 국면에서 외국계 대주주 소유로 바뀌는 인연으로 이어진다.>  
 
외환은행은 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 이후로 수출 주도형 경제를 뒷받침하는 특수은행 역할을 소화하며 국가 경제에 기여해 왔다.

하지만 근대 토지 정책 추진 기관인 동시에 압제의 상징이라는 양면을 띠던 '동척'의 한계처럼, 결국 그 터를 물려받은 외환은행 역시 영욕을 거듭했다. 외환은행은 외환 위기 국면에서도 정부 공적 자금을 받지 않는 등 선전했으나, 결국 외국계 투자자인 론스타에 매각됐다. 강정원 행장(현 KB금융 회장 대행)의 의욕적 추진으로 KB국민은행에 피인수를 눈 앞에 뒀으나, 관련 재판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매각은 불가하다는 정책적 고려에 따라 무산, 결국 아직까지 론스타 소유로 남아 있다.

◆우리은행, 터는 좋은데…민영화 매듭지을지 촉각

우리은행 본점이 위치한 서울 회현동 1가는 손꼽히는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중종 명신인 정광필의 집터로, 우리은행의 전신인 구 상업은행이 내무부로부터 불하받아 차지한 이래 상당히 애착을 보여온 곳이기도 하다.

정광필은 사림파의 거두이던 조광조를 훈구대신 남곤과 심정이 축출할 때 완곡히 반대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광조가 바로 사사되지 않고 귀양을 떠나게 된 것도 정광필의 입김 때문이었다는 것.

구한말에는 이 터에 벨기에 영사관이 들어섰고 이후 이 건물은 일제 시대에는 해군 헌병대 청사로도 쓰였다. 

구 상업은행은 1996년 상은 100주년을 기해 이 곳에 최신식 사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외환 위기 이후 구 상업은행과 구 한일은행이 합쳐지고 공적자금이 투입되면서, 이 건물은 현재 통합 우리은행의 본사로 사용되고 있다.

명당터를 차지하고도 구 상업은행이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은 터와 회사 운명이 별반 상관이 없음을 방증하는 사례로도 읽힌다.

   
  <사진="터는 좋은데…" 정승가 옛집을 차지한 우리은행은 공적자금 투입 금융기관으로 남아있어 아이러니라는 평도 없지 않다.>  
이 지역은 1979년 환경정비 구역으로 지정된 이래 오랜 시간 지지부진하다 1999년 우리은행 사옥 완공 이후 각종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서 환경 개선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상업지구와 유흥지역이 뒤섞인 혼잡한 회현동에 자리한 우리은행이 조선시대의 지기(地氣)를 다시 이어받아 민영화에 성공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옛 서울은행 자리는 일본인 즐겨찾는 중저가 호텔로

길 바로 건너편을 두고 운명이 갈리는 경우도 있다. 현재 KB금융이 자리하고 있는 인근에는 옛 서울은행이 있었다.

현재는 이곳에 IBIS 앰버서더 호텔 명동점이 들어서, 일본인 고객이 즐겨찾는 호텔로 새롭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 근방에 자리잡고 있던 국민은행은 결국 4대 금융지주 중 하나인 KB금융를 출범시키는 등 리딩 뱅크로 성장했지만, 서울은행은 하나은행에 피인수 매물로 넘어갔다. 

옛 서울은행은 은행장들 중에 망신을 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손홍균 전 서울은행장은 1996년 12월 모 기업체로부터 사례비(리베이트)를 받았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이에 대해, 손 전 행장이 한보그룹 대출을 계속 줄여 한보를 비호하던 실세의 미움을 사서 이렇게 됐다는, 이른바 표적 수사 주장도 나왔으나 이 설에 큰 설득력은 없다는 평도 따랐다.

결국 터와 은행의 운명에 명확한 상관은 없지만, 주인이 쓰기에 따라 이야깃거리를 만들면서 입에 오르내린다는 점에서 은행터에 대한 평가는 은행의 부침을 정확히 반영하는 일종의 바로미터 역을 하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  
  •    
맨 위로

ⓒ 프라임경제(http://www.newsprime.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