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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의 이해하기 어려운 부동산활용정신

환경나쁜곳에 신사옥·역세권부지는 무상임대 등 눈길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09.10.27 15:37:37

[프라임경제] 우리은행의 방만한 부동산 자산 관리가 눈길을 끌고 있다. 또 이는 하루아침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이 합쳐져 탄생한 우리은행의 특수성상 오랜 시간 유사한 문제가 반복돼 온 점도 발견할 수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구 상업은행, 30년에 걸친 명당 사랑(?)…매음굴 한복판에 새 사옥 올리기까지

우리은행의 몸체 중 하나인 상업은행은 1970년대 서울 회현동 현 우리은행 본점 건물 터를 불하받았다. 이 터는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의 저택 터로, 이후 여러 정승을 배출해 명당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구한말에 벨기에 영사관이 들어서면서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고,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해군 헌병대 청사로 사용되다 광복 후 내무부 건물을 거쳐 상업은행 소유가 된 것.

상업은행에서는 이 오래된 건물을 사용하다 1982년에 이 건물을 한강 이남으로 이전하고, 후에 이 곳에 건물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 지역은 명문가의 저택이 있었다는 역사적 의의와 일제시대부터 은행거리로 형성돼 온 명동이 가깝다는 장점 외에도 주변 환경이 좋지 않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회현동 지구가 지역 개발에 난점을 안고 있었던 것. 현재 우리은행이 들어선 지역을 중심으로, 건너편 신세계 백화점(일제 시대에는 미츠코시 백화점이 이 곳에 있었음) 등이 위치하고 아래로는 남대문 시장이 형성된 지역은 과거 '어진 선비들이 노닐던 곳'이라는 연원에 걸맞지 않게 상업지역과 유흥가가 뒤섞여 있던 곳. 국문학 연구자 일각에서는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주인공이 백화점에서 내려다 본 매음굴이 회현동 일대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에 따라 회현동 일대는 도시환경정비사업 구역으로 지정된 바 있다. 하지만 지정 시기는 1979년 11월이지만, 1999년이 돼서야 첫 지구(1지구)에 고층 건물이 들어설 정도로 주변 정비가 더뎠다. 좀처럼 진척이 없던 사업은 근래에야 2-3, 4-1, 5지구 등이 공사에 들어가면서 본격화됐다.

2-3지구에 들어설 지상 33층 규모 '남산 플래티넘'은 2010년 5월 완공된다. 이곳에서 반포로를 건넌 5지구에는 2011년 4월에나 '남산롯데캐슬'이 들어선다. 신세계 백화점에서 퇴계로 건너편에 들어서는 4-1지구 'SK 리더스뷰'는 오는 11월 완공 예정이다.

결국, 처음에는 불하를 받아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딱히 이미 있던 건물을 이전시키면서까지 새 목적을 도모할 만한 필연성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일찍이 이곳에 있던 사적지 건물(벨기에 영사관 건물)을 남쪽으로 이전해 버린 상업은행에서는, 이후에는 이곳에 장래의 새 사옥 터로 큰 의미를 부여하고, 결국 1996년 상업은행 100주년을 맞이해서는 아예 24층 건물 신축의 삽을 뜨기에 이른다.

   
  <사진=회현동 정광필 고택 터는 우여곡절 끝에 상업은행 새 사옥에서 우리은행 본점 건물이 됐다.>  
이 건물이 위에서 말한 회현동 환경정비개발 1지구 고층 건물. 결국 상업은행은 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말기에서부터 환경이 좋지 않아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누구나 판단하고 있는 '복잡한 지역'에 선발대로 들어가겠다는 구상을 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이 24층 새 건물의 건축을 처음 시작한 1996년만 해도, 회현동 여관촌이 악명을 날리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매음굴 한복판에 새 사옥을 굳이 지은 셈이다.

일각에서는 정광필 고택이라는 명당에 의미를 부여, 이 곳에 애착을 가진 게 아니었냐는 풀이까지 하는데, 어쨌거나 상업은행으로서는 꿈을 이룬 셈.

현재 이 정비지구의 각종 건물이 골조를 올리거나 완공을 앞둬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만 보면 '회현동의 상전벽해'라고도 간단히 정리할 수 있지만, 어찌 보면 상업은행으로서는 너무 일찍부터 자산을 주변사업 정화를 위해 묶어두고 있었던 셈이다.

◆새 사옥 올리면 망한다 속설 그대로?

한편 이 상업은행 100주년 기념을 기해 야심차게 구상된 24층 사옥은 현재 완공되어 우리은행 본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위와 같은 복잡한 환경을 끼고 있는 부지에 신축을 기획한 상업은행은, 결국 1999년에 24층 새 건물을 올리기에 이른다.

하지만 호사다마일까.

1999년 완공된 이 새 건물은 결국 상업은행의 새로운 100년 영화를 보지 못하고 외풍에 흔들리게 된다. 1996년 기획된 상황에서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상업은행 등 국내 은행권이 전반적으로 휘청이게 된 것. 이후 상업은행은 한일은행과 합쳐져 공적 자금을 투입받으면서 한빛은행이 됐고 이후엔 우리은행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이에 따라 1998년 말에 상업은행에서는 재무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농남아 화교 자본이나 미국계 자본에 새 사옥을 매각하고 이를 리스해 사용하는 고육책까지 검토하는 등 심각한 상황에 이른다.

외환위기 국면이라는 특수성도 있지만, 통상적으로 말하는 '사옥 지으면 기운다'는 점을 간과한 무리한 사업이 아니었느냐는 논란도 낳을 수 있는 것. 특히나 자금 흐름을 사업 목적으로 하는 전문가 집단인 은행에서 이같이 보통 산업자본들이 겪는 징크스를 겪은 점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상업은행측은 "현재 한국 부동산 가격이 떨어져 외국 자본은 이를 투자 기회로 보고 있다"는 등 다소 궁색한 변명을 매각 추진의 변으로 제시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한말 유적 멀리 남쪽 땅에 옮겨 놓고 몰라라하다 결국 서울시 좋은 일

한편 회현동 정광필 고택 터에 자리잡았던 벨기에 영사관 건물도 순탄한 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이 건물은 1982년에 멀리 남쪽 남현동으로 이축된다.

사적급 건물이라 함부로 헐어버릴 수는 없으므로, 다행히 상업은행 소유 부지가 있는 남현동으로 이동해 명맥을 잇는 행운을 누린 셈인데, 이 건물은 상업은행 사료관으로 쓰이다 1999년 무렵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이 합쳐지면서 결국 이 역할마저 모호해지게 된다.

결국 이 건물은 이후 크게 소용닿는 일이 없이 남아 있다가 2004년 5월에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에 의해 재활용이 검토되기에 이르른다. 당시 우리은행은 서울시의 금고를 맡고 있는 가까운 관계.

이 당시 시장은 문화재청 등의 도움을 얻어 리모델링 등을 해 미술관으로 사용하게 우리은행과 교섭을 하고 이때, 계약은 5년, 사용료는 무상으로 하였다.

   
  <사진=역사적 건물은 물론 역세권의 비싼 토지까지 유휴 자산이나 마찬가지로 쓰고 있는 우리은행 소유의 구 벨기에 영사관(현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  

하지만 이 건물은 사적으로서, '스토리텔링'을 잘 하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부가가치를 올릴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이 건물의 가치 뿐만 아니라 이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 은행 소유의 부지, 즉 남현동 1059-13은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이 만나는 환승역인 사당역에서 5분 거리 미만의 '역세권'으로, 이렇게 무상 임대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일 전망이다.

한편, 우리은행은 금년 5월 당초 계약이 만료되자 "동일 조건으로 동일 기간 연장했다"는 것으로, 이같은 자산의 소홀한 운영으로 사실상 지방자치단체 중 가장 부유한 축인 서울시에 이득을 주고 있는 셈이다.

시 금고를 수주하고 있는 특수 관계이고 일종의 사회 공헌이기는 하지만, 무리가 따르는 운영인 셈.

결국 이렇게 오랜 시간 부동산 자산 관리에 냉정한 판단과 안전 드라이브를 지행하기 보다는, 여러 가치관이 개입된 판단으로 흐르고 있었던 점이 향후에는 개선될지, 우리은행 민영화가 다시 논의되는 등 부실은행 타이틀을 드디어 벗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이 시점에서 새삼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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