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오는 25일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6주기를 앞두고 그불황기 투자와 품질 혁신, 인재 육성으로 이어진 그의 경영 원칙이 재조명되고 있다.
◆불황 속에도 반도체 투자
이 선대회장은 1974년 자금난에 빠진 한국반도체에 개인재산을 투자하며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향한 도전을 시작했다.
1차 오일쇼크 여파로 해외 반도체 기업들마저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삼성 내부에서도 사업 성공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 연합뉴스
그러나 이 선대회장은 자원이 부족한 대한민국이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83년 이병철 창업회장의 도쿄선언을 계기로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그해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며 선진업체와의 기술격차를 빠르게 좁혔다.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했고, 1993년에는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올라섰다.
반도체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지 약 20년 만에 미국과 일본 기업들이 주도하던 시장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이다.
세계 1위에 오른 배경으로는 불황을 기회로 활용한 선행투자와 과감한 기술 선택이 꼽힌다. 1984년 경쟁사들이 4인치 웨이퍼 생산라인을 확대하는 동안 삼성은 6인치 웨이퍼로 전환했으며, 1987년 일본 업체들이 반도체 불황으로 투자를 축소할 때도 신규 생산라인을 건설했다.
1990년대에는 8인치 웨이퍼 양산체제를 선제적으로 구축하고, 닷컴버블 붕괴와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차세대 기술에 대한 투자를 이어갔다.
이 선대회장은 반도체 뿐 아니라 컴퓨터·소프트웨어·로봇 등 첨단기술이 미래 산업의 판도를 바꿀 것으로 전망했다.
1987년 회장 취임 당시부터 컴퓨터 활용의 대변혁을 예견하고, 전자·정보기술이 기존 제조업과 결합하면서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자동차 등 전통 제조업도 전자기술과 결합해야 미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로봇에 대해서도 단순한 생산자동화 설비가 아닌 인간의 노동과 산업구조를 바꿀 기술로 바라봤다. 1990년대에는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에게 남는 핵심 역할은 창조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
이 선대회장은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인재로 꼽았다.
그는 '1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인재론을 바탕으로 국적과 출신에 관계없이 세계 최고 수준의 인재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90년 지역전문가 제도를 도입해 인재를 영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육성하도록 했다. 제도 도입 당시 비서실에서 20여 명의 선발안을 보고하자 이 선대회장이 규모를 확대하도록 지시해 200여명을 해외로 파견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선대회장은 기술과 인재를 확보하더라도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식이 달라지지 않으면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봤다.
이에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며 양적 성장에 집중하던 경영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발언으로 상징되는 신경영은 제품의 품질 뿐 아니라 사람·조직·제도·기업문화까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혁신하자는 뜻이 담겼다.
신경영의 원칙은 근무제도와 생산현장에도 적용됐다. 1993년 7월부터 오전 7시에 출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하는 7·4제를 도입했다. 업무 집중도를 높이고 퇴근 후 어학과 자기계발에 시간을 투자하도록 했다.
1995년 구미사업장에서 실시한 불량제품 화형식은 품질경영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품질 기준에 미달한 휴대전화 등 약 500억원 규모의 제품을 폐기하며 불량제품은 시장에 내놓지 않겠다는 원칙을 조직 전체에 각인시켰다.
이처럼 신경영은 기술개발과 인재육성, 제품 생산에 이르는 경영 전반의 기준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전환점이 됐다고 평가받는다.
◆KH컬렉션 기증…공공의 자산으로
이 선대회장은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을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으로 여겼다.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 해외 순회전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 삼성전자
이러한 철학을 계승한 유족들은 2021년 4월 이 선대회장이 평생 수집한 문화재와 미술품 2만30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했다.
기증품에는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김홍도의 추성부도 등 전통미술의 대표작을 비롯해 김환기·박수근·이중섭의 근현대미술, 모네와 피카소 등 해외 거장의 작품이 포함됐다.
서울에서 시작된 기증품 전시는 광주·대구·청주·제주와 경남·부산·울산 등 전국으로 확대됐다.
KH 컬렉션 국내 순회전의 누적 관람객은 350만명을 넘었다. 이는 단일 컬렉션을 주제로 한 전시 중 국내 역대 최고 기록이다.
KH컬렉션은 국내 기증과 전시를 넘어 한국 미술의 역사와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시작한 국외 순회전은 올해 3월 시카고미술관을 거쳐 이달 1일 영국박물관에서 개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