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얼마 전 한 컨택센터에서 관리자들과 OKR 워크숍을 진행했다. OKR은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표가 아니라,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를 다루는 성과관리 기법이다.
참가자들은 사전에 영상으로 개념을 익혔고, 과제도 AI의 도움을 받아 빠짐없이 제출했다. 그러나 진짜 실력은 실습에서 드러났다. 한 팀장이 이번 분기 목표(O)로 '기계적 응대가 아닌 진짜 소통하기'를 내걸었다. 핵심결과(KR)는 AI의 도움을 받아 세 가지를 제시했다. 1:1 피드백 100%를 비롯해 우수 콜 청취·공유, 공감 사례 월 10건이다.
팀장은 KR이 '핵심결과'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자기 입으로 설명까지 했다. 그런데 발표한 세 줄은 결과가 아니라 리더가 할 행동이었다. '피드백 면담과 우수 콜 공유'는 결과를 이루기 위한 필요 행동이지, 이뤄내야 할 결과가 아니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AI가 내놓은 그럴듯한 오답 앞에서 그것을 분별해내지 못했다. AI를 휘두른 것이 아니라 AI에 휘둘린 것이다.
AI는 그럴듯하게 핵심을 비껴간 답을 정답처럼 내놓는다. 질문 뒤에 이어질 가장 그럴듯한 말을 확률적으로 골라 문장을 만들기 때문에, 두루뭉술한 오답도 반듯하고 멀쩡한 모양새로 나온다.
차라리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면 팀장은 '진짜 소통이 되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를 놓고 씨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듯한 답이 먼저 펼쳐지면 고민할 기회가 사라진다. 이미 답을 찾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AI를 멀리할 일은 아니다. AI는 빠르게 선택지를 넓혀준다. 다만 그 답은 아직 날이 서지 않은 원재료다. AI에 휘둘리지 않고 AI를 휘두르려면, 무딘 답을 현장에 맞게 벼려내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숫자 뒤의 사정을 읽는 '통찰력'이다.
AI는 프롬프트에 적힌 글자만 보지만, 리더는 적히지 않은 것을 안다. 데이터에 잡히지 않는 지난 실패의 기억, 팀의 관행, 상담사들이 입 밖에 내지 않는 두려움 같은 것들이다.
상담사가 기계적으로 응대하는 것은 소통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전광판에 뜨는 평균처리시간(AHT)이 신경 쓰이고, 길어진 통화로 지적받을까 두려워서다. 통찰력 있는 리더는 AI가 놓치는 관점을 견지하고 문제를 다르게 정의한다.
둘째, 버리고 책임지는 '결단력'이다.
AI는 모든 경우의 수를 나열할 뿐 버리지 못한다. 무엇이 실패하든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드백도 하고, 우수 콜도 공유하고, 공감 사례도 모으라는 숙제 세 가지는 현장에 새로운 행정 부담으로 얹힐 뿐이다.
리더의 벼림은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잘라내는 데서 시작된다. 둘을 과감히 버리고, 남긴 하나에 자기 이름을 거는 것이다. 이름을 건다는 것은 이런 약속까지 붙인다는 뜻이다. "고객 말을 끝까지 듣느라 길어진 콜은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이 약속이 빠진 핵심결과는 현장을 움직이지 못한다.
셋째, 현장의 언어로 옮기는 '번역력'이다.
AI는 현장의 피로와 냉소를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모범 답안도 현장의 귀에는 다르게 꽂힌다. 우수 콜을 골라 함께 듣자는 말을, 상담사는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는지 줄 세우겠다'는 뜻으로 듣기 쉽다.
정답을 들이민다고 사람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문턱을 낮추고 작은 성공부터 맛보게 해야 한다. 우수 콜을 평가하는 대신 '이번 주 나를 가장 울컥하게 만든 고객의 말 한마디'를 나누는 1분 티타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잘한 콜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인 순간을 꺼내놓는 자리에서는 평가받을 걱정 없이 입을 열 수 있다.
팀장은 결국 AI가 써준 세 줄을 지웠다. 무엇을 할 것인가 대신, 진짜 소통이 일어나면 고객에게서 무엇이 달라질지를 다시 물었다. 그렇게 새로 쓴 핵심결과는 이것이었다. '끝까지 들어줘서 고맙다는 고객 칭찬, 상담사 1인당 2건 더 받기'.
AI의 조언은 채굴해 온 광석에 불과하다. 리더의 역할은 이 무딘 텍스트를 대장간에서 달구고 두드려, 불순물을 털어내고 현장을 파고드는 예리한 행동의 칼날로 벼려내는 데 있다. AI보다 모든 것을 더 잘 알 필요는 없다. 무엇을 확인하고 무엇을 결정할지, 그 판단을 쥐고 있는 한 리더는 AI에 휘둘리지 않고 AI를 휘두를 수 있다.
지윤정 (윌토피아 대표/ 성신여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