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벤틀리가 브랜드 첫 순수 전기차를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공개할 시장으로 한국을 택했다. 한국 진출 20주년이라는 상징성만으로 보기에는 시점이 흥미롭다. 올해 벤틀리의 글로벌 판매가 줄어드는 동안 국내 판매는 두 배 가까이 증가했고, 본사 최고경영진은 한국의 젊은 고객층과 빠른 기술 수용성을 직접 언급했다.
첫 순수 전기차 '토르칼(Torcal)'은 이런 한국 시장에서 곧바로 주문 접수에 들어갔다. 벤틀리가 전동화 과정에서 한국을 단순 판매처보다 새로운 기술과 제품에 대한 반응을 확인할 주요 시장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이번 아시아 최초 공개에서 드러났다.
벤틀리모터스는 지난 15일 서울 성북구에서 토르칼을 아시아 최초로 공개했다. 프랑크-슈테펜 발리저(Frank-Steffen Walliser) 벤틀리모터스 회장 겸 CEO와 크리스토프 조르주(Christophe Georges) 세일즈·마케팅 총괄 이사, 로빈 페이지(Robin Page) 디자인 총괄, 데이브 헤이터(Dave Hayter)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 등 본사 주요 경영진도 서울을 찾았다.

브랜드의 새로운 디자인 언어가 적용된 토르칼은 벤틀리 최초로 풀 액티브 서스펜션을 탑재했으며, 기본형 토르칼과 더욱 스포티한 토르칼 S 등 두 가지 선택지를 통해 차별화된 감성과 디자인, 퍼포먼스를 표현한다. ⓒ 벤틀리모터스코리아
한국의 최근 판매 흐름은 글로벌 시장과 방향이 다르다. 폭스바겐그룹 집계에서 벤틀리의 올해 상반기 글로벌 고객 인도량은 4200대로 전년 동기 4900대보다 13.6% 감소했다. 중국과 미국 등 주요 시장의 어려움이 영향을 미쳤다. 올해 1분기에는 매출도 4억6200만유로로 전년 동기 6억6100만유로보다 줄었고 영업손익은 2600만유로 적자를 기록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반기 227대가 신규 등록돼 전년 동기 116대보다 95.7% 증가했다. 절대 판매량은 크지 않지만 글로벌 판매가 감소한 시기에 한국이 정반대 흐름을 나타냈다는 점은 첫 전기차의 아시아 공개지를 서울로 정한 배경을 들여다보게 한다.
발리저 CEO는 현장에서 한국 시장을 두고 "시장 규모도 크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가는 시장이라 매우 중요하다"며 "한국에서 받아들여진 자동차 기술은 전 세계에서 통한다고 생각할 정도이고 고객층도 상당히 젊다"고 말했다.

전면부에는 컨티넨탈 T를 비롯한 벤틀리의 상징적인 모델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 요소가 적용됐으며, 진보한 라이팅 기술과 독창적인 일루미네이티드 다이아몬드 그릴을 통해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 벤틀리모터스코리아
토르칼의 역할도 여기서 선명해진다. 벤틀리는 첫 전기차를 기존 모델의 파생형으로 만들지 않았다. 컨티넨탈 GT와 플라잉스퍼, 벤테이가에 이은 독립적인 모델이자 브랜드 최초의 도심형 럭셔리 SUV로 개발했다. 한국에서는 기존보다 폭넓은 고객층과 접점을 만드는 미래 전략의 핵심 모델로 토르칼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 사업의 지난 20년을 보면 새로운 차종을 투입해 시장을 넓혀온 과정도 확인된다. 헤이터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은 "20년 전 한국은 승용차 중심의 시장이었지만 벤틀리가 컨버터블 및 2도어 시장을 열었고, 10년 전에는 벤테이가를 출시하며 SUV 수요를 키웠다"며 "토르칼을 통해서도 성장을 이어갈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실제 한국에서는 플라잉스퍼가 오랫동안 벤틀리 판매의 중심을 맡았다. 플라잉스퍼는 2023년 하이엔드 럭셔리 세단 최초로 국내 누적 판매 2000대를 돌파했고 당시까지 벤틀리 국내 전체 판매량의 46.4%를 차지했다.

벤틀리 윙 엠블럼에서 영감을 받은 대시보드가 대칭성과 힘, 균형감을 강조하는 동시에 과감하면서도 깔끔한 표면 구성을 통해 각 소재 고유의 질감과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 벤틀리모터스코리아
세단 중심으로 형성된 고객 기반에 벤테이가가 SUV 수요를 더했다면 토르칼은 순수 전기차라는 새로운 제품 축을 추가한다. 벤틀리가 강조하는 젊은 국내 고객층까지 고려하면 첫 EV에는 기존 고객의 파워트레인 선택지를 넓히는 것 이상의 역할이 주어진 셈이다.
그렇다고 토르칼을 앞세워 판매 대수를 공격적으로 끌어올리는 방향은 아니다. 최근 글로벌 판매 감소에 대한 질문에 발리저 CEO는 "벤틀리는 가치와 수익성을 목표로 해왔지 판매 대수를 목표로 삼은 적은 없다"며 "몇 대를 판매하느냐보다 브랜드 가치와 회사 전체의 수익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토르칼 역시 대량 판매를 위한 전기차보다는 벤틀리가 유지해온 희소성과 가격대를 지키면서 고객 구성을 넓히는 성격이 강하다. 국내 판매가격은 기본형 토르칼과 고성능 모델 토르칼 S 모두 3억3000만원부터 시작한다. 주문은 아시아 최초 공개 당일부터 시작됐고 첫 고객 인도는 2027년 말로 예정됐다.

시트 역시 토르칼을 위해 새롭게 설계됐다. 기본적으로 시트에는 16-way 전동 조절과 열선, 통풍, 조절식볼스터 및 새로운 마사지 기능이 적용된다. ⓒ 벤틀리모터스코리아
제품에는 기존 벤틀리가 강조해온 성능과 안락함을 전기차에 옮기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토르칼 S는 최고출력 888마력(PS)과 최대토크 137.7㎏·m를 발휘하고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2.9초 만에 가속한다. WLTP 기준 최대 주행거리는 600㎞이며 400㎾ 급속충전 시 배터리 잔량 10~80% 충전에 16분이 걸린다.
발리저 CEO는 "지난 107년간 벤틀리는 여유롭고 강력한 퍼포먼스, 탁월한 안락함, 최고급 천연 소재를 활용한 정교한 영국의 장인정신 그리고 영혼이 담긴 사운드를 갖춘 더없이 완성도 높은 자동차를 만들어왔다"며 "새로운 토르칼은 모든 핵심 영역에서 비범한 기준을 제시한다"고 자신했다.
첫 전기차가 나왔다고 기존 파워트레인을 빠르게 정리하는 것도 아니다. 발리저 CEO는 전기차 기술과 충전 인프라가 토르칼을 선보이기에 충분히 성숙했다고 평가하면서도 "내연기관과 PHEV가 모두 대체되고 순수 전기차만 운행되는 시기까지는 아직 수십 년이 남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벤테이가를 완전히 전기차로 전환할 계획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토르칼은 불필요한 선을 의도적으로 덜어내고 차체의 면과 비율 만으로 감성과 캐릭터를 드러내도록 했다. ⓒ 벤틀리모터스코리아
결국 벤틀리의 전동화는 기존 파워트레인을 순차적으로 걷어내는 방식과는 다르다. 내연기관과 PHEV를 유지하면서 순수 전기차를 또 하나의 선택지로 추가하고, 첫 모델에는 기존 라인업과 겹치지 않는 도심형 SUV라는 역할을 부여했다.
그 출발점이 한국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헤이터 총괄은 "한국은 지난 20년간 혁신과 장인정신, 탁월한 퍼포먼스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공유하는 고객들과 함께 벤틀리의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며 "서울에서 토르칼을 아시아 최초로 공개할 수 있어 매우 뜻 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 진출 20년 동안 플라잉스퍼로 세단 시장을 다지고 벤테이가로 SUV 고객을 넓혀온 벤틀리는 이제 토르칼을 통해 전동화 고객층을 추가하려 한다. 글로벌 판매가 위축된 시기에도 국내 판매가 성장한 가운데 첫 전기차의 아시아 데뷔와 주문 접수를 한국에서 동시에 시작한 것은 이런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토르칼의 역할은 전기차 판매량을 늘리는 데만 있지 않다. 판매량보다 가치와 수익성을 앞세운 벤틀리가 3억원대 가격과 브랜드 희소성을 유지하면서 젊은 고객층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첫 전기차다. 빠른 기술 수용성과 상반기 성장세를 동시에 보여준 한국은 그 전략을 가장 일찍 확인할 시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