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황소울음을 금빛으로
시 '향수'에는 토속적 순 우리말로 새겨진 그리움이 있다. 시노래 '향수'에는 '딴다라와 클래식'의 만남으로 비난 받았지만 '클래식과 가요'의 만남으로 승화된 줄거리와 작곡가 김희갑의 사연이 녹아있다.
'실개천이 지즐댄다'는 청각의 시각화와 '황소 울음'을 금빛으로 표현한 공감각적 심상 등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극치로 끌어 올린 위대함도 있다. 아울러 후렴구인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의 반복을 통해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한 시대적 공감성도 있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송강 정철의 8대손인 정지용시인은 1902년생으로 스물한 살 때인 1923년에 이 작품을 썼다.
태몽이 지용(池龍)으로 그야말로 지드래곤이다. 휘문고 졸업 후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 학생이었던 시절, 고향 충북 옥천의 향토와 풍광을 상상하며 구상한 듯하다. 도시샤대학은 10여년 후 시인 윤동주도 다녔는데, 지금도 이 대학에는 두 시인의 시비가 서 있다.
정시인의 부친은 중국과 만주를 방랑하며 한의술을 배웠고 고향으로 돌아와 한의업을 개업, 꽤 많은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어느 해 밀어 닥친 홍수피해로 가세가 기울었다.
이후 그의 부친은 처가 친척인 송지원농장에서 머슴을 살았다. 정시인은 어릴 적 이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
고향을 생각하면 이렇게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지는 회억도 있지만, '향수'란 시를 통해 어릴 적 고향을 그리는 시인의 마음이 우리 곁에 있는 듯하다.
그는 1930년대 들어 문단 최고의 권위자가 되었고 찾아오는 젊은 문학도들을 발굴했다. 서정주가 자신의 시 '벽(壁)'을 들고 찾아왔을 땐 '지독한 놈! 드디어 조선문단에 진짜 시인이 한 명 나타났구나'라며 그를 추천했다.
윤동주에게는 '자네의 시에는 영혼을 울리는 맑은 부끄러움이 있네'라며 추천하기도 했다.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별과 시'가 나오자 서문을 쓰고 세상에 널리 알린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청록파 삼인인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과 시인 이상을 문단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그는 모더니즘의 문학을 최초로 시도해 정착시킨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이화여전교수와 경향신문 주필을 맡는 등 굴지의 지식인이었고, 프로레타리아 이념을 가졌던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력으로 이승만 정권 아래서 압박을 받았다.
1950년초 이승만정부의 반공검사 오제도는 이런 이들을 보호지도한다는 명목으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어 강제가입시켰는데, 이때 정지용 시인도 이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6.25가 터지자 불안해진 시인은 그 해 9월 집을 나갔고 그 후 남북 어디서도 행방이 묘연했다. 월북한 문인으로 분류돼 그의 작품이 금기시됐다. 하지만 1988년 3월 해금돼 현재는 교과서와 문학사에 이름이 올려져 있다.
이 노래를 태생시킨 가수 이동원이 작곡가 김희갑을 찾아갔을 때 그는 "1988년 이동원과 KBS음악PD 신광철이 '향수'란 시를 들고 저를 찾아 왔어요. 월북 시인 정지용이 해금된 게 그 무렵입니다. 도저히 노래가 안 되겠더라고... 그만 두려하면 찾아와 조르고 졸라 열 달이나 걸렸는데, 동료 선후배들이 놀랐어요. 희갑이가 그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고. 대중가요 작곡가의 자존심을 살렸다는 뜻이였겠지요."라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1989년 9월, 이동원은 이 노래를 들고 서울대 음대교수 테너 박인수를 찾아가 합류를 요청했다. 어린시절 미아리에서 살았던 박인수는 "정지용 시를 읽는 순간 그곳에서 미꾸라지를 잡으러 개울을 헤집고 다니던 유년 시절의 풍경이 떠올랐다"며 승락했다.
◆200만장의 신화
이동원은 1970년 데뷔했지만 오랜 기간 무명 가수였다가 1984년에서야 이름이 알려졌다. 그해 봄이었다. 정호승 시인을 찾아가 정 시인 작품 '이별 노래'에 곡을 붙여 노래하고 싶다고 해 허락을 받았다. 그해 가을 정 시인을 다시 찾아가 노래를 들려줬다.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정호승 시인은 당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애절한 곡조 위에 이동원의 사색적인 음색이 흐르는 노래를 들으며 절로 감탄했다. 이 노래로 이동원은 처음 방송사 10대 가수에 올랐다. 앨범은 100만 장 넘게 팔렸다. 그 뒤 1989년 향수는 200만장이 넘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이동원은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돼 받아 주세요' 고은시인의 시에 김민기가 곡을 쓰고 1971년 최양숙이 부른 '가을 편지'는 이동원이 리메이크해 다시 국민 애창곡으로 태어났다.
이동원은 그가 만든 '나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이별 노래'와 천상병시인의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귀천'의 노랫말처럼 2021년 영원한 별이 됐다. 식도암이었다. 말년엔 전북 남원 지리산에 있는 개그맨 전유성의 집에서 투병 생활을 했다.
전유성은 젊은 시절 이동원 집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 후에도 둘은 오랜 기간 경북 청도에살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전유성도 지난 2025년 9월25일 이동원을 따라 별이 됐다. 1938년생인 박인수교수는 1989년 클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국민가요 향수를 부르자 마자 클래식음악을 모욕했다며 내정돼 있던 국립오페라단 단장자리를 그만둬야 했다.
그러나 4년후 KBS가 열린음악회를 개시하고,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등 3대 테너가 크로스오버음악을 선보이자 도리어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지난 2003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백석대 석좌교수를 끝으로 2023년 LA에서 생을 마쳤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가을이 왔다. 곧 겨울도 올 참이다. 이 두 계절에 한 번도 밤무대에 선 적이 없는 음유시인 이동원을 기리며, 그의 시노래들을 들어 볼 참이다.
왜냐하면 그의 노래에는 인간적 온기와 살가움이 담겼고, 그것들이 확장돼 하늘과 우주의 숭고함으로 번지는 느낌이기에. 또한 계절맞춤으로, 아련함과 그리움의 파스텔조 색상들이 어른거리기에...
이상철 위드컨설팅 회장/칼럼니스트·시인·대지문학동인/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회장(前)/국회 환노위 정책자문위원/ 국회의원 보좌관(대구)/ 쌍용그룹 홍보실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