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인공임신중지 약물 '미프진'의 국내 도입이 본격화되면서 의료현장에서의 처방과 진료 기준을 둘러싼 논의도 시작됐다. 의료계는 정부의 단계적 도입 방향에는 공감하면서도 의사의 진료 선택권과 배우자 동의 요건 등은 법적 기준을 명확히 마련해야 안전한 제도 정착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약물 자체의 안전성뿐 아니라 약물 복용 이후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을 의료체계 안에서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약물 사용 이후 출혈이나 감염, 불완전 임신중지 등의 문제가 의료기관 밖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사전 진단부터 복용 후 추적관찰, 응급상황 대응까지 연결되는 관리체계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김희선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이번 제도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법적 기준 마련을 꼽았다. 김 교수는 대한산부인과학회 등이 참여하는 '안전한임신중절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다.
김 교수는 "약물 사용이 허용되는 임신주수와 사유는 물론 처방자와 처방기관, 처방 의료인의 진료선택권, 미성년자를 포함한 대상자의 배우자 등 제3자 동의 절차 여부까지 관련 기준을 법적으로 명확히 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희선 안전한 임신중절위원회 간사(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산부인과 교수). © 대한산부인과학회
◆"약물 안전성과 안전한 관리체계는 다른 문제"
정부는 현재 임신 9주 이내를 전제로 임신중지 약물을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김 교수는 향후 국내 사용 경험과 안전성 데이터가 축적될 경우 사용 가능 주수나 처방·조제 방식이 달라질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선 국내 의료환경에 맞는 데이터 확보가 필요하다고 봤다.
김 교수는 "현재 도입하려는 2제 복합제는 비교적 안전한 약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안전한 관리체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내에서의 임상 경험이 없는 만큼 정부에서 제안한 2년 동안 약물 사용 현황과 약물 사용에 따른 임신종결 및 합병증, 부작용 현황 등을 파악해야 한다"며 "국내 의료환경과 의료전달체계에 맞는 약물관리체계가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비급여로 도입될 경우 실제 의료현장에서 어느 정도 활용될지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비급여로 도입되는 낙태약물이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사용될지는 2년간의 추적 데이터를 분석한 후 판단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임신중절에 대한 모니터링 방안도 구축돼야 한다"고 했다.
◆합병증 의료기관 밖에서 발생 가능…24시간 대응체계 필요
임신중지 약물 도입에서 의료계가 주목하는 부분은 복용 이후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관리다. 수술적 임신중지와 달리 약물을 복용한 뒤 출혈이나 통증 등이 의료기관 밖에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환자를 적절한 의료기관으로 연결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약물 사용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합병증이 의료기관 밖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라며 "전문 진료역량을 갖춘 의사에 의한 처방과 초음파를 통한 임신주수 확인, 자궁외임신 배제, 임신 종결 여부 확인을 위한 추적관찰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24시간 비대면 상담을 통해 응급상황 발생 시 신속하게 안내하고 전원할 수 있는 사후관리체계가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상담 창구를 마련하는 것뿐 아니라 상담 인력에 대한 교육과 표준화된 대응 절차도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의사 진료선택권 존중…응급상황에서는 환자 보호 우선
의사가 개인적인 신념이나 판단에 따라 임신중지 약물 처방을 원하지 않을 경우 이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도 제도화 과정에서 풀어야 할 과제다.
김 교수는 의료진의 진료선택권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진료를 거부하는 의료진의 권리는 의료진의 신념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며 "다만 임신중절 행위와는 별개로 환자에게 합병증이 발생하거나 출혈·감염 등 응급상황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환자 보호가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취약지에서는 의료진의 진료선택권과 환자의 의료 접근권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백도 고려해야 한다고 봤다. 김 교수는 "의료취약지와 같은 지역에서는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나 공적 정보제공 체계를 통해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임신중절 전후 관리까지…여성건강 영역으로 확대 가능
학회는 임신중지 약물의 제도화가 초기 임신중절에 대한 의료 접근성을 높이는 계기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초기 임신중절의 접근성이 높아질 수 있고 수술과 마취에 대한 부담을 줄이면서 보다 비침습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지역별 수술 가능 의료기관의 격차도 일정 부분 완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의 선택권과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도 변화가 예상된다고 봤다. 그는 "약물과 수술 중 자신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적합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고 진료 과정에서의 심리적 부담과 낙인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다만 임신중지 진료가 약물 처방이나 수술 자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게 학회의 시각이다. 김 교수는 "임신중절 전후 관리와 임신 종결 여부 확인, 사후피임과 정신건강 상담까지 전 단계에 걸친 관리 역할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피임 및 성상담, 우울·불안 선별, 향후 임신계획 상담으로 연결한다면 포괄적인 여성건강관리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2년간 데이터 축적…"국가 단위 안전성 모니터링 필요"
장기적인 제도 발전을 위해서는 국내에서 실제 약물이 어떻게 사용되고 어떤 부작용과 합병증이 나타나는지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김 교수는 현재 도입 방안을 일정 기간 운영하면서 국내 의료환경에 맞는 의료전달체계를 마련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무엇보다 임신주수가 불확실한 상태에서의 복용, 자궁외임신의 지연 진단, 예상보다 많은 출혈이나 지속되는 통증 등이 여성건강의 안전 측면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라며 "표준진료체계와 복용 후 24시간 비대면 연락체계, 응급전원체계, 사후확인체계를 포함한 적정보상체계와 국가 단위 안전성 모니터링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신중지 이후의 관리뿐 아니라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교육과 임신·출산 지원정책을 함께 강화해야 한다는 제언도 내놨다.
김 교수는 "연령별·발달단계별 포괄적 성교육과 실질적인 피임 접근성 강화를 통해 무분별한 낙태를 예방하는 동시에, 불가피하게 임신중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에게는 임신중절 전후 상담을 표준화해 신체적·심리적으로 안전하게 진료받고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청소년과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의 경우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별도의 보호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취약한 청소년과 취약 여성에게는 비밀보장과 의사결정 지원 등의 안전한 보호체계를 마련해 의료 접근이 지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임신중지 여부에 대한 선택 자체를 넘어 임신·출산·양육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지원도 함께 강화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사회경제적 임신지원정책을 강화해 임신 유지와 임신중절 중 어느 한쪽을 강요하지 않고 여성이 충분한 지원 속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임신·출산·양육 지원이 함께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