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어릴 적 어머니는 밥솥의 불을 끄고도 한참을 열지 않으셨다. 다 된 것 같은데 왜 열어보지 않냐고 보채면 돌아오는 답은 늘 하나였다. "뜸 들여야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뜸이 다 든 솥을 열 때 피어오르던 김과 냄새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언제나 코끝에 남아 있다. 기다림이 만든 냄새였다.
뜸이라는 말을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 말은 밥에서 태어나 삶으로 건너간 말이다. 우리는 말을 꺼내기 전에 머뭇거리는 사람에게 "뜸 들이지 말고 말해"라고 한다. 결정을 미루는 일도, 고백을 망설이는 일도 모두 뜸을 들인다고 표현한다. 밥 짓는 마지막 순서가 사람의 마음을 설명하는 말이 된 것이다.
이는 외국어로 옮기기 어려운 표현이다. 서두르지 않는 시간에 이름을 붙인 언어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밥과 삶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실제로 외국인에게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말 중 하나가 이 뜸이다. 서양에도 쌀 요리는 있다. 이탈리아의 리조또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리조또는 육수를 부어 가며 저어서 익히는, 이를테면 끝까지 손을 대는 요리다. 반면 한국의 밥은 정반대다.
마지막에 불을 끄고 손을 떼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으로 완성된다. 리조또와 우리 밥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가 바로 이 뜸의 유무다. 그래서 한국의 밥을 세계에 소개할 때 정작 전해야 할 것은 쌀의 품종도, 밥솥의 성능도 아니다.
불을 끄고 기다리는 그 시간, 뜸에 담긴 이야기다. 그 스토리가 빠지면 한국의 밥은 그저 또 하나의 쌀 요리가 되고 만다. 뜸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곧 한국의 식문화를 이야기하는 일이다.
뜸은 게으른 시간이 아니다. 불을 껐다고 밥이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솥 안에서는 그때부터 진짜 맛있는 기적이 시작된다. 남은 열기가 쌀알 속으로 스미고, 수분이 고르게 퍼지고, 밥알 하나하나가 제자리를 잡는다.
서두르면 설익고, 건너뛰면 질어진다. 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밥이 밥으로 완성되는 시간이다. 정성이라는 말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 몇 분을 기다려 주는 마음, 그것이 정성이다.
생각해 보면 한국의 맛은 처음부터 기다림의 맛이었다. 된장과 간장은 해를 넘겨 익고, 김치는 땅속에서 겨울을 나며, 젓갈은 삭는 시간을 견뎌야 비로소 맛이 된다. 세계가 열광하는 K푸드의 깊은 맛은 사실 발효와 숙성, 즉 기다림이 만든 맛이다.
뜸은 그 기다림의 문화가 밥 한 그릇에 응축된 가장 작은 단위인 셈이다. 빨리 만드는 법은 세계 어디에나 있지만, 기다려서 완성하는 법은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서양 요리의 정점에도 똑같은 지혜가 있다는 점이다. 좋은 스테이크를 굽는 요리사는 불에서 내린 고기를 곧바로 썰지 않는다. 잠시 재워 둔다. 이른바 레스팅이다. 이 몇 분 동안 고기 안의 육즙이 고르게 자리를 잡고, 비로소 깊은 맛이 완성된다.
굽는 기술만큼이나 굽고 난 뒤 기다리는 기술이 최고의 맛을 가른다. 뜸은 밥의 레스팅이다. 서양이 고기에서 찾은 그 지혜를, 우리는 오래전에 밥에서 길어 올렸다. 서양의 식탁 한가운데 스테이크가 있고 우리 밥상 한가운데 밥이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각자가 가장 귀하게 여긴 재료에 가장 정성스러운 기다림을 바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뜸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전자레인지 2분이면 밥이 나온다. 이 편리함은 조금도 낮춰 볼 일이 아니다. 새벽에 출근하는 사람에게, 혼자 사는 청년에게 즉석밥은 참 고마운 발명품이다. 다만 한 가지는 짚고 싶다. 그 편리함 속에서 우리가 잃은 것은 밥이 아니라 밥을 기다리던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뜸 드는 몇 분 동안 오가던 대화, 밥 냄새가 퍼지던 저녁, 솥뚜껑을 여는 순간의 작은 설렘. 편리함은 밥을 남겼지만 그 시간들을 뺏었다.
그래서 편리함과 정성이 반대말이라는 통념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로컬에서 밥 짓는 경험을 제품으로 만드는 일을 하며 얻은 확신이다. 기술의 역할은 정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정성이 좀 더 쉽게 가능하도록 돕는 데 있다.
씻고 다듬는 수고는 기술이 덜어 주되, 뜸 드는 시간만은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 편리함이 정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으로 가는 문턱을 낮춰 줄 때, 기술은 비로소 따뜻해진다. 그것이 진정한 푸드테크가 아닐까.
혼자 사는 어르신들께 밥을 보내드리며 배운 것도 이와 같았다. 즉석밥을 밥으로 여기지 않으시는 분들이 많다. 처음에는 고집이라 여겼지만, 그것은 고집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그분들에게 밥이란 뜸 드는 시간까지 포함한 것이었고, 기다림이 빠진 밥은 어딘가 덜 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밥에만 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관계에도, 일에도, 마음에도 뜸 드는 시간이 필요하다. 답장을 하루 재워 두는 것, 아이의 대답을 끝까지 기다려 주는 것. 빨리 여는 솥마다 설익은 밥이 나오듯, 우리 삶도 그런지 모른다.
여기에 곱씹어 볼 역설이 하나 있다. 세계가 아는 한국의 이미지는 '빨리빨리'다. 무엇이든 빠르게 해내는 사람들. 그런데 그 빠른 손끝이 만들어 온 우리 음식의 진짜 맛은 정작 정반대편, 느리게 익고 오래 기다린 것들에서 나온다. 발효와 숙성, 그리고 뜸. 빨리빨리로 알려진 우리가 사실은 가장 잘 기다려 온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진정한 K푸드를 세계에 전한다는 것은 이 빠른 겉모습 안에 숨은 기다림의 미(味)학을 찾아내 담아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라면의 빠름이 K푸드의 문이었다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만나야 할 안방은 뜸과 발효가 빚어낸 기다림의 맛이다.
오늘 저녁에는 한 번쯤 뜸을 들여 보시길 권한다. 밥이든, 말이든, 마음이든. 불을 끄고 조금만 기다려 보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은 그 몇 분이 무언가를 완성할 것이다. 갓 뜸 든 밥의 김처럼, 천천히 피어오르는 것들이 결국 오래 남는다.
다음 끼니에 뵙겠습니다.

- ㈜ 잇더컴퍼니 대표
- 제주푸드테크협의회 공동회장
- 서울대학교 푸드테크 최고책임자과정
수료 및 월드푸드테크협의회 정회원
전) 매일유업 조리식품 브랜드매니저
전) WK 마케팅그룹 브랜드컨설팅 컨설턴트
전) 한화 S&C 마케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