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초혼'은 지붕에 올라가 북쪽을 보고 망자가 입던 옷을 털며 이름을 연거푸 불러 흩어진 혼을 소리쳐 부르는 '고복'이라는 상례절차다. 김소월은 1925년 1월 잡지 영대 5호에 이 시를 "옛님을 따라가다 꿈 깨어 탄식함이라"로 발표했는데, 나중에 '초혼'으로 개작했다.
초혼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든 그 사람이여!
사랑하든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저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여!
사랑하든 그 사람이여!
그녀가 죽었다. 얼만큼 사랑했었으면,... 깊은 심저에서 분출되는 슬픔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시가 나올까! 시의 마지막 단에 보인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의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소월은 오산학교시절 같이 수업을 받던 외자이름 오순과 첫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소월은 열네 살에 이미 장가를 간 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친구의 손녀 딸인 홍단실을 소월의 배필로 점찍고 있다가 소월이 철이 들 무렵에 혼인을 시켰다. 오순은 그 보다 두세 살 위 누나 뻘이었고 소월이 결혼은 했으나 반짝반짝 빛나는 소월의 총명함과 천재성에 반해 있었다.
그녀는 어부의 딸로 의붓어미 슬하에서 고통을 받으며 자랐다. 전통설화 접동새 사연과 닮아 있는데, 계모에게 학대 받아 죽은 두 누이가 접동새가 되어 아홉명의 남동생들 앞에서 밤마다 슬피운다. 이후 딸들을 죽인 새엄마도 벼락에 맞아 까마귀가 되었고, 접동새들이 미워 물어 뜯기에 밤에만 나와 슬피 운다는 전설이다.
김소월의 시 '접동새' 또한 오순이를 생각해 지은 듯하다.
접동새 - 테너 임재홍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피리를 잘 불었던 소월은 그녀와 개여울에 나와앉아 노래와 함께 음악을 즐겼다. 오순은 학교를 오가는 길옆 개울에 이르면 항상 쉬어가자 했었고, 돌 위에 앉아 멍을 때리곤 했다. 어느 덧 열 아홉 살이 된 오순도 시집을 갔다. 그러나 잊어진 듯한 어느 날 오순이 죽었다는 부고가 날아 들었다.
오순은 시집간 지 3년만인 스물두 살에 남편에게 맞아 죽고 만다. 오순의 남편은 의처증이 심했다.그것이 소월에 대한 의구심이었는 지는 밝혀진 바 없다. 소월은 그녀의 상가를 방문한다. 소월의 대표 시 중 하나인 이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졌다.
그 어떤 말도 필요없는 이별의 고통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사랑했던 여인이 하루 아침에 파편이 되어버린 상실을 경험한다.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과 상실, 이 세상 그 어떤 고통보다 더 아픈 상처, 그 절규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시구로 토해낸다. 그토록 온전히 마음속으로 품고 있었던 여인이 오순이였다.
소월의 나이 스무살 때 쓰여진 첫사랑에 대한 기억, 이루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쓴 이 시 또한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에 실려서 소월을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잡았다. 개여울을 좋아했던 그녀와 관련됐을 것으로 추측되는 '노래 된 시' 한 편을 더 보자.
개여울 - 정미조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 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말라는 부탁입니다
이 곡은 1967년 이희목이 곡을 붙여 가수 김정희가 처음 불렀는데, 정미조가 1972년 리메이크해 히트한 곡이다. 2017년 아이유에 의해 다시 리메이크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갓 대학생이 됐을 소월은 만남과 이별의 세상이치를, 그리고 사랑과 헤어짐에 대해서, 삶의 안타까움과 방황 그리고 슬픔에 대해 이렇게나 절절하게 표현해 낸다.
시인 허인은 이 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소월은 그녀가 앉아 있던 과거의 개여울과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개여울을 대비시키며
그녀와의 추억을 들추어 낸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단 스무 살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고 약속을 하던 그녀를 그리워한다.
압권인 다른 대목은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말라는 부탁인지요"다. 가면서도 아주 가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그녀의 내심을 읽어낸 구절 일 수도 있고, 결국 당신을 잊지 않겠다는 소월 반어적 의지표현일 수도 있다.
소월은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인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사립 남산학교 졸업 후 이승훈선생이 설립한 민족학교 오산중학교를 다녔는데, 여기서 시 스승인 김억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을 만나게 된다.
김억은 이광수시인의 후임으로 국어를 가르치던 선생이었는데 소월의 6촌 자형이었다. 이때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김억은 소월을 문단에 소개시키고 그의 작품활동을 지원한 사람이다. 소월은 가난했기에,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도 그의 돈으로 출간됐다.
그의 기구한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시로 만든 노래를 들으면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김소월 시노래 이야기는 3편으로 이어간다.)
이상철 위드컨설팅 회장/칼럼니스트·시인·대지문학동인/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회장(前)/국회 환노위 정책자문위원/ 국회의원 보좌관(대구)/ 쌍용그룹 홍보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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