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기아(000270)가 다시 한 번 전동화 전략의 속도를 조정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전기차(EV) 확대 기조는 그대로다. 오는 2030년까지 전기차 100만대 판매, 14개 전기차 라인업 구축, 차세대 플랫폼 도입 등 계획만 놓고 보면 여전히 공격적이다.
하지만 이번 2026 CEO 인베스터 데이(CEO Investor Day)에서 더 눈에 띄는 대목은 다른 곳에 있다. 기아가 전기차 확대와 함께 하이브리드(HEV) 비중을 예상보다 훨씬 크게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2030년 목표 기준 하이브리드는 110만대로 제시됐다. 전동화 전략의 중심축이 전기차 하나에만 놓여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판매 계획 수정으로만 보기 어렵다. 전기차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던 글로벌 자동차시장이 최근 들어 다시 현실적인 속도로 조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충전 인프라 확충 속도는 시장마다 제각각이고, 배터리 가격과 원자재 공급망 부담도 여전하다. 여기에 일부 시장에서는 전기차 수요 둔화, 이른바 캐즘(Chasm) 논쟁까지 겹쳤다.
이런 상황에서 완성차 업체들이 다시 하이브리드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나아가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까지 포트폴리오를 넓히는 흐름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기아의 이번 전략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전동화 전환이라는 큰 방향은 유지하되 △시장 △지역 △수요층에 따라 다른 속도를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공격적 전기차 확대와 하이브리드 강화가 동시에 제시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전기차를 미래로 두되, 하이브리드를 현재의 수익성과 볼륨을 떠받치는 축으로 삼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기아가 공개한 중장기 전략을 보면 이 판단은 더 분명해진다. 2030년까지 내연기관 신차 9종을 출시하고, 하이브리드 13개 라인업을 운영하겠다는 계획은 단순한 과도기 대응이라기보다 시장의 복수 정답을 전제로 한 전략에 가깝다.
하이브리드 판매 목표는 2026년 69만대에서 2030년 110만대로 늘어난다. PHEV와 EREV를 포함한 판매 목표는 115만대 수준이다. 기아가 전동화 시대를 전기차 단일 해법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이 부분은 최근 글로벌 완성차 업계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업계의 화두는 '전기차 전환 속도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속도보다 수익성과 유연성이 더 중요한 화두가 됐다.
북미에서는 하이브리드 수요가 빠르게 살아나고 있고, 유럽은 전기차 전환이 가장 빠른 지역이지만 여전히 과도기 대응이 필요하다. 신흥시장에서는 전동화 인프라보다 가격과 공급 유연성이 더 중요한 변수로 남아 있다.
기아가 지역별 전략을 다르게 짠 것도 이런 이유다. 미국에서는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4개에서 8개 차종으로 확대하고, 유럽에서는 전기차 비중을 공격적으로 늘리면서도 하이브리드 보강과 공급 거점 다변화로 전환기 리스크를 줄이겠다는 전략을 병행했다. 신흥시장에서는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현지 생산 기반을 결합해 판매 확대를 노리고 있다.
결국 이번 전략의 핵심은 '전기차 중심'이 아니라 '전동화 수익성 중심'에 있다. 전기차는 미래 성장의 방향이고, 하이브리드는 당장의 규모와 이익을 떠받치는 현실적 축이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기아가 내놓은 수치들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2030년 미국 판매 목표는 102만대, 시장점유율 6.2%다. 여기서 핵심 수단으로 제시된 것이 하이브리드 확대, SUV 볼륨 모델 육성, 픽업 시장 진출이다. 말하자면 미국에서의 성장 전략은 전기차 단독이 아니라 SUV와 하이브리드, 일부 신차 투입이 결합된 복합 전략이다.

기아의 플래그십 전동화 SUV EV9. ⓒ 기아
하이브리드 상품성 강화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기아는 올해 처음 도입한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통해 연비와 출력을 4% 이상 향상시키고, 스테이 모드와 실내 V2L 같은 전기차급 편의 기능을 하이브리드에 적용했다.
단순히 하이브리드를 '전기차로 가기 전 거쳐 가는 차'가 아니라, 하이브리드 자체를 경쟁력 있는 상품군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도다. 실제 시장에서도 하이브리드는 전기차보다 가격 저항이 낮고, 내연기관보다 규제 대응력이 높으며, 충전 인프라 제약도 받지 않는다. 캐즘 국면에서 하이브리드가 다시 강한 상품으로 부상하는 이유다.
여기에 EREV 카드까지 더해진다. 기아는 북미 핵심 시장 공략을 위해 바디 온 프레임(Body on Frame) 기반 EREV 픽업 라인업을 2030년 도입한다. 이 부분은 의미가 작지 않다. 미국 시장은 픽업 비중이 높고, 동시에 순수 전기 픽업은 가격과 주행거리, 충전 편의성에서 아직 대중적 확산의 한계를 보인다.
EREV는 이런 한계를 우회할 수 있는 해법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기아가 이 영역까지 언급했다는 것은 단순히 EV와 HEV를 병행하는 수준을 넘어, 시장별로 가장 현실적인 전동화 조합을 찾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물론 기아가 전기차 전략을 후퇴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기차 제품 경쟁력과 접근성, 공급망 강화라는 세 축은 더 구체화됐다. 2030년까지 △승용 2종 △SUV 9종 △PBV 3종을 포함한 총 14개 EV 라인업을 구축하고, 2026년 EV2와 시로스 EV를 시작으로 보급형 EV를 본격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차세대 EV 플랫폼 도입을 통해 배터리 용량을 최대 40% 늘리고, 모터 출력 9% 향상, 5세대 배터리 적용 등 상품성도 끌어올리겠다고 했다. 여기에 레벨2++ 자율주행과 신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까지 결합하겠다는 청사진도 내놨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전기차 전략조차 '전기차만으로 간다'는 선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급망 측면에서도 △한국 △유럽 △미국 △인도 등 권역별 생산 최적화가 강조됐고, 충전 인프라 역시 △북미 △유럽 △한국 등 주요 시장별로 접근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풀어졌다. 다시 말해 기아는 전기차를 확대하되, 전기차 일변도의 구조로 가기보다 시장별 체력을 감안한 유연한 전환을 택했다.
재무 목표도 이런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기아는 2030년 △매출 170조원 △영업이익 17조원 △영업이익률 10%를 제시했다. 단순히 판매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수익성을 동반한 초과 성장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전동화 전략 역시 판매량 자체보다 믹스와 원가, 공급망 효율성까지 염두에 둔 구조로 봐야 한다.
특히 목표 달성 핵심 요인으로 △신차효과 △친환경차 판매 확대 △차세대 시스템 전환 △배터리 시스템 구조 단순화 △공급망 현지화 △스마트팩토리 전환을 제시한 점은 기아가 전동화를 기술 경쟁보다 사업구조 혁신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인베스터 데이에서 드러난 기아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전기차 시대는 오고 있지만, 그 길은 생각보다 단선적이지 않다. 전기차가 미래라는 점은 변함없지만, 그 미래에 도달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아는 전기차를 키우면서도 하이브리드를 더 크게 키우고, 필요하다면 EREV까지 넣는다. 산업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수익성을 잃지 않는 방향으로 전동화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결국 기아의 이번 전략은 전기차 시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기차 시대를 더 오래, 더 안정적으로 버티기 위한 조정이다. 전기차만으로는 아직 부족한 시장에서 하이브리드는 시간을 벌어주고, EREV는 공백을 메우며, 지역별 유연 생산은 리스크를 줄인다. 기아가 다시 하이브리드를 키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동화 전환은 계속되지만, 그 전략은 전기차 단일 해법에서 보다 현실적인 조합으로 이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