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15일 혁명전승지 방문으로 멕시코에서 혁명을 준비한 ‘피델’과 ‘체 게바라’가 82명의 전사와 함께 멕시코에서 출발하여 애초에 의도한 지역이 아닌 그란마 지역의 해변에 도착하여 ‘바스시트’ 정권에 맞서 쿠바혁명의 서곡을 올렸던 지역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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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마” 부근 주택> | ||
버스로 이동하는 중에 주택을 개량하거나 신축하고 있었다. 혁명 이전에 쿠바에서는 20만 채의 판잣집 농촌과 도시에 40만 가구가 최소한의 위생시설도 없이 초가집이나 셋집에서 살았고 220만 명이 도시 인구는 수입의 1/5~1/3을 집세로 내고 있었다.
혁명이후 INRA(국가토지개혁국) 중심으로 INAV(민간건설업자 공개입찰)를 통하여 2만호 주택건설에 투입되었고 혁명 초기에 경기 활성화와 함께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주택의 형태는 우리나라 국민주택처럼 평수나 형태가 모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상당수 가옥이 완공상태가 아닌 채로 있었으며 기초공사를 하고 이후 공사를 하지 못하여 잡초가 무성한 곳도 상당 수 눈에 띄었다. 이 지역은 쿠바에서도 빈촌이라고 하였다.
쿠바에서는 교육, 의료가 무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빈부격차의 문제는 어떠한 형태로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원인을 알 수 없지만 물자부족(유재현의 표현)과 건축노동자의 수가 부족하여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쿠바의 주요 생산품목이 시멘트인데 물자부족으로 판단하기에는 문제가 있으며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을 까 생각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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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사현장> |
47년 ‘피델’은 ‘도미니카’ 공화국을 공격하여 독재자 ‘트루질로’를 타도하기 위해 3천명 원정군을 결성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쿠바 해군 정에 의해 중도에 막히자 몇몇의 동지들과 3마일을 헤엄쳐 왔다고 한다. ‘피델’이 존경하는 사람은 ‘호세마르티’(위대한 애국자)와 ‘에두아르도 치바스’(신설정통당 대선 후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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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마르티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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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라마에스트로” 산맥> |
‘피델’은 쿠바사회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장혁명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3개(피델, 아벨외1)의 조직이 1년을 준비하여 반란군 약 200명의 남자와 2명의 여성을 조직하였다. 계획은 ‘쿠바’의 군 요새 중 두 번째로 큰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쿠바 민중들이 ‘바시스트’ 정권에 대항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7.26일은 ‘산티아고쿠바’ 축제의 날이라 병사들의 기강이 흐트러지는 시기로 판단하였다. 마에스트로 산맥 부근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차량과 무 기를 위장하여 아지트에 숨겼다.
25일에 소집하여 아지트에서 습격에 대해서 논의를 하였으나 일부는 동의하고 일부는 불참을 결정하고 병영습격을 위해 '산티아고'로 차량이동을 하였으나 차량 1대는 셋 길로 빠지고 나머지 차량만이 분산하여 방송국, 병원을 장악하였으나 ‘몬타나’ 병영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공격에 가담했던 일부는 사망하고 일부는 채포되었으나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피델’은 마지막까지 동료들을 피신시키고 ‘마에스트로’ 산맥으로 피신하였으며 ‘바시스트’ 정권은 사살 명령을 내렸으나 ‘피델’은 체포 과정에서 동대학 학생 출신 군인에 의해 체포되어 사살만은 면하고 투옥되었다. 그리고 법정에서의 몇 차례 과정에서 직접 변호사석에 앉아 변론하면서 엄청난 내용의 변론을 준비하였다.(지금도 그 자료가 남아있다.) 당시 변론자료에는 쿠바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역사가 나를 심판할 것이다”는 내용이 압권이었다. 변론자료가 ‘피델’이 꿈꾸는 쿠바사회의 기초적인 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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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6 병영 건물> |
1956년 11월25일 82명의 전사들은 10명 정도 승선이 가능한 배(그랑마)를 타고 ‘산티아고’의 서쪽에 위치한 ‘니케’로 향하였으나 ‘어촌벨리’에 배가 좌초되고 말았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82명의 전사들 중 60명은 사살되고 10명은 투옥되고 12명만이 살아남아 혁명을 주도하여 성공시켰다. ‘피델’은 실망과 좌절대신, 그는 쾌활하고 낙천적인이고 확신에 차게 발언하였다고 한다.
“독재의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과연 12명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가능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7.26이 쿠바 혁명에서 역사적인 성과가 그 만큼 크다는 것이다) 남한은 제주4.3항쟁과 여순사건 그리고 빨치산 투쟁을 통하여 수십만 인민들이 죽었으나 오히려 자본주의 체계가 강화되고 역사적인 평가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배가 도착한 지역은 혁명의 출발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쿠바처럼 바닷물이 맑고 깨끗하면서 잔잔하였다. 82명의 전사들이 도착하였을 때 대서양이 요동쳤다고 한다. 바로 쿠바 인민들의 마음에도 혁명의 불길이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지 않았을까? ‘산티아고’ 쿠바는 남한으로 보면 광주로 인식하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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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영습격사건 사망자들> | ||
‘산티아고쿠바’에 있는 ‘몬타나’ 병영은 혁명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건물은 유치원과 박물관으로 탈바꿈을 하였다.
건물에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있었으며 병영 안에는 7.26에 대한 역사박물관이었으며 혁명에 참가하여 고문당하고 그리고 마에스트로 산맥에서 혁명투쟁을 전개한 모든 자료가 있었다. 혁명의 뜻을 아는지 모르지만 어린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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