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중국과 일본은 역사를 통해서 국가의 내일을 설계하고 국민적 자긍심 고양을 위해 없는 역사도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웅혼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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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인조 임금은 청태종 홍타이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 ||
우리가 떠올리기 싫은 역사 중에는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년)이라는 참담하고도 수치스러운 역사가 있다. 조국이 풍전등화의 절박한 상황에서도 또 다시 ‘화친론(和親論)’과 ‘척화론(斥和論)’으로 나뉜 고위관료들은 피차 목숨을 건 명분싸움을 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 사이에서 오고간 말의 성찬은, 이른바 수사학의 극치를 이뤘다.
지금은 잘 쓰지 않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여자들의 싸움에서 ‘화냥년’이라는 욕이 흔했다. 당시 여자들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욕이었고, 당연히 그 욕을 듣는 쪽은 “화냥질하는 거 봤어”라며 길길이 뛰었다.
화냥년의 역사는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정묘호란(1627년 인조 5년)’에 이어 일어난 병자호란 때가 가장 심했다. 전쟁에서 끌려갔다 돌아 온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했는데, 몸을 더럽힌 여자라 하여 손가락질을 받았으며, 가족 또한 반겨주지를 않았다. 그러던 것이 ‘화냥년’으로 바뀌었고, 70년대까지 여자들에게 가장 치욕적인 욕이었다.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될 참람한 일들이 당시의 관료들의 정보부재로 인한 탁상공론과 명분론, 그리고 인조의 과단성 부재와 무능력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도자나 공직자들이 주변국의 움직임에 대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정보수집이나, 상황에 따른 탄력적이지 못한 외교의 결과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엄청난지에 대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 고위관료들에게,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같은 우리 역사왜곡에 대해서 국민의 이름으로 채찍을 가하는 마음으로 다시 떠 올려 쓴다. 인조 15년(1637) 1월 30일. 남한산성에 몽진해 적군과 대치하고 있던 인조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휘하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선다.
적장에게 항복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적장이란 후금을 창업한 누루하치의 아들인 청태종 홍타이치(皇太極)를 말하지만,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 조정과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를 오랑캐(만주족)의 괴수로 멸시해 왔으므로 그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죽기보다 더한 수모를 감내하는 일이었다.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 마련된 수항단(受降檀)에 올라 청태종 홍타이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지 246년, 조선의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몸소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청태종 홍타이치는 항복한 조선왕조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수모를 강요하였다. 전쟁의 책임을 조선 조정에 전가하는 이른바 전후처리라는 착취의 감행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수항단이 마련되었던 자리에 비석을 세워, 청태종 홍타이치의 위명을 영원히 기리되 그 비문은 자신들이 검증한다는 것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명칭대로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고 한다. 비문을 쓴 대제학 이경석은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더없는 명문이나 치욕의 내용이라 세세히 읽어 보는 이가 없고, 비 앞을 지날 때는 다들 고개를 돌렸다고 전한다.
지금은 일시 잠잠해졌지만,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중국의 동북공정은, 언제 어떻게 또 우리를 아프게 할 지 모른다. 이명박정부의 고위관료들은 꼭 한 번 가봐야 할 곳이다.
비록 수치스러운 역사이지만, 그를 통한 뼈아픈 성찰과 함께 실기하지 말고 우리의 역사의식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장병영 민족혼 되찾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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