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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정의 인간지능] ⑤ 고양이인가? 호랑이인가?

 

지윤정 윌토피아 대표 | press@newsprime.co.kr | 2026.03.23 14:38:38
[프라임경제] 컨택센터에서 경력을 쌓은 베테랑 상담사들에게는 공통적인 증상이 있다. 어느 정도 업무가 익숙해지면 전문성을 향한 치열함보다는 "이 정도면 됐지"하는 정체기에 들어선다.  

처리율이 안정화되고 상담품질 점수가 평균을 유지하면 더 이상 실수하고 싶지 않은 방어 기제가 작동한다. 굳이 새로운 시도를 할 필요가 없어져 자신만의 안전한 응대 방식에 함몰된다. 조금 까다로운 상황이 펼쳐지면 금세 매뉴얼로 물러서고 고객이 요목조목 따지면 매뉴얼에 없다고 숨어버린다. 

더 진전된 설득과 조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지적받지 않을 정도로만 상담한다. 괜히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한다. 그렇게 규정 뒤로 물러서고 스크립트에 묶이다 보니 이제 아예 생각이 사라졌다. 안 하다 보니 못하게 됐다. 그렇게 호랑이는 조용히 고양이가 된다. 문제는 본인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AI 시대를 맞아 많은 상담사들이 두려워한다. '내 일자리를 AI가 빼앗아가는 거 아니야?' 위협을 느낀다. 그런데 진짜 기회를 빼앗는 건 AI가 아니라 자기 인식이다. 스스로를 '처리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매뉴얼대로 하는 사람'으로 축소시킬 때 마음갑옷을 입게 되고 생각수갑을 차게 된다. 예전에는 그게 맞았다. 

예전에는 빨리 많이 처리해야 했다. 그게 급했다. 하지만 이제 AI가 단순 처리를 대신하면서 인간 상담사는 본연의 역할을 할 여유와 정보를 갖게 됐다. 고객 말끝의 뉘앙스를 읽고 말하지 않은 마음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숨겨진 진짜 니즈를 읽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고객의 문의는 빙산의 일각이다. 그 밑에 말하지 않은 많은 염려와 혼란이 숨겨져 있다. "환불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 뒤에는 제품에 대한 실망이 있고, "배송 언제 오나요?"라는 물음 뒤에는 중요한 일정이 걸려 있으며, "이거 되나요?"라는 확인 뒤에는 구매에 대한 망설임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이런 신호들을 보면서도 "죄송합니다, 환불 도와드리겠습니다"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없었고, 처리율이라는 숫자가 목을 조였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멈출 수 있다. 물을 수 있다. 제안할 수 있다. "혹시 어떤 점이 기대와 달랐을까요?" "이 상품을 선택하셨을 때 뭘 기대하셨어요?" "제가 다른 옵션도 함께 보여드려 볼까요?" 이건 단순히 친절한 응대가 아니다. 고객의 선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마케터의 역할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담함이 필요하다. 대담함은 우주선을 띄우겠다거나 나라를 구하겠다는 영역에서만 발휘되지 않는다. 상담에서도 대담함이 필요하다. 고객이 좋은 선택을 하도록 돕고야 말겠다는 나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고객의 까칠함에 휘둘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용기. 그게 대담함이다. 고객 상담 곳곳에서 대담함을 발휘할 대목이 있다.

한 상담사의 이야기다. "환불 요청 콜을 받았는데, 고객 목소리가 너무 아쉬워 보였어요. 그래서 물었죠. '혹시 이 제품 때문에 준비하시던 게 있으셨나요?' 알고 보니 결혼기념일 선물이었어요. 다른 옵션 두 개를 즉시 배송으로 보내드렸고, 고객은 환불 대신 교환을 선택했습니다. 나중에 감사 메일도 보내오셨고요." 이게 대담함이다. 이게 고객이 진짜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파고들어 파악하고 해결하는 대담한 상담이다. AI가 절대 할 수 없는 인간 상담사의 가치·매력이다.

사실 대담함은 새롭게 배워야 할 능력이 아니다. 베테랑 상담사의 내면에 이미 존재한다. 다만 "빨리 처리해야 돼"라는 숫자의 압박과 "이 정도면 됐어"라는 타성이 창문에 쌓인 먼지처럼 그 빛을 가렸을 뿐이다. 뜨거운 주전자를 만지려는 조카에게 대담하게 소리를 지르고, 차도에 넘어진 사람을 용감하게 끌고 나오던 나의 대담함. 그걸 깨워야 한다. 잘못 보일까 조심스럽고 까칠한 고객 반응에 주눅 들면서 감춰버렸던 나의 대담함을 회복해야 한다.

당신 안의 호랑이는 죽지 않았다. 다만 잠들어 있을 뿐이다. AI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객을 위해서다. 고객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주기 위해서다. 이제 대담함을 깨울 때다. 당신은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다.

지윤정 (윌토피아대표/ 성신여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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