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은행자본확충펀드에 대해 시중은행들은 일제히 ‘환영’ 견해를 표명했으나, 막상 이 제도를 신청하는 것에는 우려가 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번 자본확충펀드는 20조원 규모로 조성되는데, 이번 펀드 조성과 신청 접수가 경영권 침해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논점을 낳고 있는 것이다.
◆조성 서두른 배경, 왜?
정부는 은행들이 경제침체 상황에서 유동성 공급 장치로서 버텨줄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구상 하에 BIS 비율 상향 조정 등을 주문해 왔다. 이런 상황에 이번 펀드 조성 역시 은행을 튼튼하게 만들어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나온 것으로 읽힌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이달 초, 은행 자본확충에 대한 3단계 안을 청와대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1단계는 은행이 후순위채 발행과 부실 기업 퇴출 등의 자구 노력을 통해 스스로 자본을 확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우면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과 연기금 등이 참여하는 자본 확충 펀드를 만들어 은행 후순위채 등을 매입해 주는 2단계로 돌입하며, 3단계는 공적 자금 투입이라는 것이다.
이번 펀드 조성은 이 중 2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부가 경제침체가 장기화 국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판단을 하면서 고삐를 바짝 죄기로 결심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임승태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은 18일 “현 상황은 U자형 경기침체 보다 L자형 장기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더 크다”며 “감독당국이 제일 우려하는 것은 R공포(경기후퇴 Recession에 대한 공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은행들로서는 이번 펀드에 대해 “위기에 대한 백업”이라고 평가하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만들어져 있는 것은 좋지만, 선뜻 신청하는 것과는 또다른 문제라는 이야기다. 이는 경영에 대한 금융감독당국 입김 강화에 대한 불안감으로 풀이할 수 있다. 또 구조조정 등의 가능성도 큰 부담이다.
◆은행들 가급적 자체적 자금 조달 초점
일단 은행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정부가 제시한 기준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내년 1월 말까지 BIS 비율을 12%, 기본자기자본(Tier1) 비율을 9%까지 맞추라는 게 정부측 주문이다.
이런 요건 강화 상황에 대해 신한금융지주회사가 18일 임시이사회를 개최하여 자회사인 신한은행에 8,000억원의 증자를 실시하기로 결의하는 등 은행마다 전방위로 노력 중이다.
하지만 현재 이 시점까지 BIS 비율과 기본자기자본 비율을 시중 은행들이 모두 맞추기는 어려운 상황. 기본자기자본 비율은 9월말 현재, 국민은행 9.17%, SC제일은행 9.06%, 신한은행 8.50% 씨티은행 8.43%, 외환은행 8.31%, 우리은행 7.64%, 하나은행 7.43% 등이다. 은행권에서는 이들 중 2개 이상은 정부측 데드라인을 맞추지 못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정부·여당 압박 “지금 안 받으면 앞으로 구제금융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여당의 압박도 높아져 가고 있다. 금융위측의 펀드 신청 은행의 경영권 침해 최소화 발언이 ‘당근’이라면,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원장이 내놓은 “자본확충펀드는 일정 기간만 운영하자”는 제한은 대표적인 ‘채찍’으로 읽힌다. 임 위원장은 이번 20조원 규모 자본확충펀드를 일정 범위로 한정해 운영하자고 나섰다.
즉 기간 안에 자본확충펀드를 신청하지 않았다가 이후 부실화된 은행은 구조조정이나 인수합병(M&A)을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한국은행이 시중은행들의 자금 역류 현상에 대해 ‘일부 회수’라는 강수를 두고 있는 것과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시중은행들은 한국은행 등이 원하는 대로 금융유동성 확대에 응하는 대신, 한국은행이 푼 돈의 상당 부분을 다시 한국은행에 갖다 맡기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은 18일 환매조건부 채권(RP) 매각 입찰에서 은행권이 낸 응찰 금액(41조원대)에서 13조원만 흡수해 준 상황이다. RP 거래를 통해 한국은행이 시중 단기 유동성을 제어해 온 것을 감안하면, 시중 유동성 공급을 위해 시중은행들을 억누르기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은행들이 무리한 BIS 비율 등 확충 노력에 제동을 건 것으로, 여력이 충분하지 않으면 펀드를 이용하라는 ‘통첩’을 내보낸 셈이다.
◆부실기업솎아내기 통한 대출 부담 제거가 급선무
하지만 이렇게 압력을 행사하는 와중에도 시중은행들이 신청을 기피하는 것은 이번 펀드를신청한다고 해서 ‘나쁜 은행’으로 모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불식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일전에 부동산 PF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대주단’ 출범 당시에도 건설사들이 부실 회사로 낙인찍히지 않겠느냐는 정보 노출 문제로 소극적으로 판단했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정부와 여당이 이번 펀드 조성이 이른바 금융위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제시한 3단계 안 중에서 2차안임에도 불구, 자구 노력 가능성을 지나치게 빨리 매듭짓고 펀드 이용으로 유도하는 게 아니냐는 점이 논란거리로 남을 전망이다.
모 은행의 경우 외자유치 등을 통해 자본 확충을 할 아이디어를 제출했다가 한나라당측의 냉담한 반응에 직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자본확충펀드가 마련돼 있다”는 것이 부정적 견해를 낸 이유인데, 이는 은행의 자구 노력보다는 정부 지분 확대를 통한 신속하고 확실한 자본 확충이 여권 및 정부의 기본 방침이라는 것으로 읽혀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는 은행 스스로 자구안과 경영쇄신안을 내도록 하고 이것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 2안으로 들어간다는 구상과 배치되는 것이다. 정부 스스로 위기 상황에 대한 예비 카드를 너무 빨리 꺼내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또 은행들의 펀드 이용을 사실상 강제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영에 입김을 넣는 등 정부가 입맛대로 다루려고 이미 구상을 끝냈다는 해석을 낳을 수도 있다.
이는 경영권 침해를 최소화할 것이라는 금융위의 입장표명이 사실상 허언에 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 일관성과 투명성 면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아울러, 현재 ‘돈맥경화’ 문제의 가장 큰 뿌리는 은행들이 두려워하는 채권 부실화 우려, 즉 부실기업에 대한 선별 문제를 마무리하기도 전에 은행에 대한 압박이 먼저 진행될 것이라는 점도 우려 사항이다.
금융위는 18일 금융위 업무추진계획(은행자본확충 펀드도 이때 발표)에서 자금 지원을 했는데도 부실이 여전한 기업과 은행에 대해서는 ‘내년 하반기’부터 구조조정을 본격 추진키로 했다. 내년 초까지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를 확대 개편하고, 은행별로 구조조정 전담조직을 만들어 선별적으로 퇴출토록 할 방침이라는 것이다. 즉 부실기업 솎아내기 문제와 자본확충펀드 이용 유도가 엇박자를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은행들이 그간 심한 모럴 헤저드를 보여온 점과 장기간 경제침체를 견디면서 산업에 대한 금융권의 지원 여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본확충펀드 동원을 통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해야 할 필요도 있으나, 문제는 부실기업 등을 솎아내는 문제를 빨리 손대는 등으로 은행의 대출 공포감을 풀어주는 문제보다는 금융권에 정부자금 투입을 강하게 압박하는 데 속도를 내는 것은 선후가 바뀐 것이라는 문제가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부실기업 정리에서 너무 온정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저간의 우려를 재확인하는 것이어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과도 연결되는 문제다. 자본확충펀드 추진과정에서 이런 문제점이 함께 해결될지, 혹은 은행에 대한 압박 마무리로 가닥을 잡을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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