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연 최대 200억달러 분할 투자, 핵추진잠수함 건조 승인, 중국과 7개 양해각서 체결. 경북 경주에서 열린 제3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서 올린 성과다. 여기에 한중 관계 복원, 한일 셔틀외교 재가동 등 다자·양자 외교에서도 실질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APEC 외교의 최대 현안은 한미 관세협상이었다. 당초 미국은 3500억달러 선불 대미투자를 고집했다. 지난 29일 오전까지만 해도 관세협상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연간 최대 200억달러 분할 투자' 방식으로 조정하고 '상업적 합리성' 원칙이 명시됐다.
여기에 핵추진잠수함(SSN) 건조 승인이라는 이외의 성과도 거뒀다. 다만 핵추진잠수함 추진에는 △원자력협정 △국제원자력기구(IAEA) 규제 △연료공급 체계 등 후속 절차가 남아 있어 실질적인 이행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경주박물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한 뒤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11년만에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도 의미를 가졌다. 양측은 △실버경제 △혁신창업 △서비스무역 △통화스와프 등 민생·경제 중심의 7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를 통해 자유무역협정(FTA) 2단계 협상 가속화와 AI·바이오·녹색산업 협력 확대에 뜻을 모았다.
아울러 미중도 정상 간 무역합의를 통해 중국이 중국의 해상·물류·조선 산업에 대한 미국의 '무역법 301조' 조사에 보복하기 위해 시행한 조치를 철회하고 다양한 해운 기업에 부과한 제재도 철회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조만간 한화오션의 미국 내 자회사에 부과했던 제재 조치도 공식적으로 철회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APEC 기간 중 한일 정상회담도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였다. 극우파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에 대한 우려였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과거사 언급 없이 실용 협력에 초점을 맞췄다. △공급망 안정 △첨단기술 분야 협력 △청년·문화 교류 확대 등 실질협력 방안을 폭넓게 논의했다. 양국은 경제안보 협력 채널을 강화하고, 기업 간 투자와 기술 교류를 확대하기로 했다.
이번 APEC 정상회의의 핵심 성과는 '경주선언' 채택이다. 정상들은 '연결(Connect)·혁신(Innovate)·번영(Prosper)'을 기본 축으로 무역·투자, 디지털 전환, 포용적 성장을 포괄한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특히 APEC 사상 처음으로 '문화창조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명문화했다. 또 'AI 이니셔티브'와 '인구구조 변화 대응 프레임워크'를 포함시켰다.
다만 이번 경주선언에는 기존 정상선언에서 관례적으로 포함되던 "규범에 기반한 다자무역체제 지지, 그 중심에 세계무역기구(WTO)가 있다"는 문구가 빠지고, 대신 "글로벌 무역체제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표현으로 대체됐다. 이는 미중 간 의견차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의장국인 한국이 절충안을 마련한 결과로,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다자주의 약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는 해석이다.
이 대통령은 APEC을 계기로 글로벌 기업과의 경제 협력도 강화했다. 엔비디아로부터 최신 GPU 26만개(약 14조원)를 확보하고, 아마존웹서비스(AWS) 등으로부터 90억달러(약 13조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엔비디아와 AI팩토리 구축 협력에 나섰다. 또 대한항공은 보잉 및 GE에어로스페이스와 대규모 항공기·엔진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조선 분야에서는 1500억달러 규모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추진돼 상선·함정 공동건조와 친환경 조선 기술 교류 협력이 논의됐다. 전문가들은 이번 협력이 양국 간 상호보완적 공급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1일 HICO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외교가는 이번 회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세부 협상 문서화와 후속 절차가 남아 있다고 평가한다. 한미 관세협상과 안보 합의는 문안 조율이 진행 중이며, 핵추진잠수함 도입은 국제규범과 원자력협정 등 제도적 검토가 필요하다.
또 미중 갈등이 재점화될 경우 균형외교 유지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일본 내 정치적 변수에 따라 과거사 문제가 다시 부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내적으로는 여야 대립 구도 속에서 외교 행보의 초당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과제로 꼽힌다.
이번 경주 APEC을 통해 한국은 실용외교의 기반을 확립했다. 이 대통령은 한미 협상 타결, 한중 관계 복원, 한일 협력 재가동 등 실질적 성과를 이끌어냈고, 경주선언을 통해 다자외교의 중심에서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남은 과제는 합의의 제도화와 균형 유지다.
세계질서의 변곡점에서 실용외교는 단순한 외교 노선이 아니라 국익을 지키는 생존 전략이 되고 있다. 향후 한국 외교는 협력과 경쟁이 교차하는 복잡한 구도 속에서도 현실적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경주에서 확인된 외교의 저력이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국익외교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