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이명박 정부가 은행을 연이어 압박하고 있다. 기업들에게 유동성을 공급하라는 것이다. 기준금리를 내려도 좀처럼 돈이 돌지 않는 상황에 애가 탄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이 연이어 나서서 금융권에 대한 강도 높은 주문을 한지 이미 오래다. 이 대통령은 “비 오는데 우산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라디오 시정연설을 기화로, 이후에도 은행에 기업 유동성을 지원해 주라는 질타를 여러 차례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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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들을 압박, 유동성 지원을 독촉하는 정부에 대해 최근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
그러나 당국으로서는 은행의 대응이 몸사리기 수준에서 오십보 백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급기야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뉴욕 출장길에 은행간 인수합병도 생각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폭탄 발언을 내놨다. 뉴욕발 “10년 전 낫과 망치를 다시 꺼낼 것을 검토 중”이라는 발언은 정부가 외환위기 당시 단행한 각종 금융권 대수술을 다시 한 번 시도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낳으며 업계에 충격을 던져줬다.
이 발언을 놓고 실제로 은행들의 인수합병 등 구조조정 문제를 언급한 것이라는 해석과 함께, 은행 길들이기 내지는 압박 카드라는 해석도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이미 내년도 한국 경제의 마이너스 성장까지 점쳐지는 상황이다. 이런 때 기업체들을 죽이고 살리는 문제는 바로 금융 유동성이다. 더 많은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지원이 아쉽다.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은행들을 상대로 ‘군기잡기’를 한 것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은행들, 더 지원 늘리기엔 애로사항 많아
이 뉴욕발 발언에 대해 시중은행 관계자들은 “글쎄요”라는 반응이다. 하지만 애써 “무슨 뜻인지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라며 즉답을 피하는 이면에는 당혹감이 짙게 배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은행들도 그동안 당국과 여론으로부터 수많은 비판을 받으면서 기업 유동성 지원에 최대한 나선 상태라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표정이다. 이미 유동성 지원에 최대 출력을 내다시피 매달린 기업은행은 물론, 이미 운전자금과 분할상환액을 연장조치하는 등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국민은행과 우리은행 등에는 유동성지원반 등 대응기구를 만들어 은행 최고 수뇌부에서 이를 챙기고 있다.
물론 유동성지원반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질타도 있다. 하지만 은행 관계자들은 “이미 상당한 케이스가 심사 대상에 올랐고, 지원 내역이 사안마다 모두 다르므로 일률적으로 도식화해서 내놓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이미 나간 지원도 지원이지만, 신규 대출을 늘리기 위해 최대한 일선지점을 독려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런 이면에는 은행들 역시 생존위기를 버텨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작용하고 있다. 급기야 최근까지는 은행들의 복지부동을 질타하던 목소리 대신 은행들을 과도하게 몰아세우는 정부 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정부가 기업지원 때 직접 옥석가려 봐라”
이렇게 은행들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마른 수건도 한 번 더 짜겠다’고 나섰던 전 위원장이 발언을 슬그머니 거둬들이는 모습이 연출됐다. 우선 발언 내용 중 일부가 한국은행과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결정할 사안들에 대해 금융위 차원에서 ‘주문’을 한 점이 문제가 돼 사과 를 한국은행측에 전하면서, 이번 뉴욕 발언은 유야무야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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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감독당국간에 불협화음도 기업유동성 지원과 구조조정 단행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금융위원회 전횡으로 속앓이 중인 한국은행> |
하지만 이 낫과 망치 발언이 남긴 후유증은 상당했다. 은행들을 꾸준히 압박하는 도가 지나쳤기 때문이기도 하고, 직접 일에 나서지 않고 간접 지원, 간접 압박을 지향하는 MB정부식 업무 태도에 대한 염증을 이번에 심하게 느꼈다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우선 이번 발언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며 나선 인물은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다. 김 교수는 21일 다음 아고라에 글을 올려, 은행 군기잡기에 나선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김 교수는 “공개적으로 은행을 몰아세우는 것은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행을 협박해서야 시장이 은행을 믿겠느냐? 신뢰도가 떨어진 은행이 어떻게 신용을 창조하겠느냐”고 주장했다.
또 “건설사를 살리겠다고 대주단에 가입하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문제다. 은행이든 건설회사든 자기 살려고 하는 본성이 있는 것이다”라면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고 주장했다.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뉴욕에서 한 건 하셨다”고 (강제적인) 은행 짝짓기 발언을 소개한 다음에는 “오랄 헤저드가 문제”라고 이번 발언을 ‘문제 발언’으로 규정했다.
한 마디로 은행 몰아세우기가 정도를 넘어섰고,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23일 내놓은 보고서도 이런 맥락에 닿아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에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을 주문하면서 “전담부서를 두고 정부가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을 ‘죽이고 살리는’ 작업을 은행들에게 맡기기에는 때가 이미 좋지 않다는 것이 보고서의 지적이다.
즉 기업들이 유동성 공급이라는 전제 하에 기업들을 지원할지 여부를 ‘대출심사’하고 혹은 거절하는 방식으로 대처하기에는 위기 파고가 높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옥석 가리기’를 직접 팔걷어붙이고 하는 대신 은행 뒤에 물러앉아 ‘유동성 지원’을 촉구하는 정부 방침에 수정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10년 전 기업 구조조정 방식 교훈살릴 때
이런 곳곳에서의 위기음을 종합하면, 현재 금융당국이 은행들을 ‘마른 수건도 한 번 더 짜는’ 식으로 독려하는 것만으로는 깊어만 가는 경제침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널리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금융위와 한국은행간에 업무 분장 문제를 둘러싼 다툼이라는 해프닝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금융감독당국간의 좌충우돌 문제를 교통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높다는 인식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대목이다. 아울러, 정부가 본격적으로 경제침체 초입에서 기업 유동성 확보, 그리고 그 대상을 직접 선별하는 문제도 공론화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지난 외환위기 때에 정부는 금융권 구조조정과 함께 금융기관들이 ‘기업부실판정위원회’를 통해 강도 높은 대책을 밀고 나가도록 힘을 실어줬다. 사실상 정부가 궂은 일의 책임을 떠안고 나선 셈이다. 1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위기해결방식을 빠르고 제대로 정해 대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와 은행이 원칙없이 혼선을 빚다가는 화만 키울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는 점에서, 학계와 기업연구소들이 내는 경고음은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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