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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구상 실현후 시나리오] 2012년 경희씨의 하루

가스 전기 물값 천정부지...찜질방 문화 '퇴장' 의료비 '급등'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08.06.23 14:30:11

[프라임경제] 2012년 가을 아침, 28살 경희 씨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 선선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덕수궁 돌담길을 걸은 탓일까. 오슬오슬 감기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다. 코를 훌쩍이며 경희 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방으로 나섰다.

주방에 들어선 경희 씨는 전기 밥솥의 취사 스위치를 누르고 국을 끓인다. 국은 쇠고기무국이다. 경희 씨는 잠시 몇 년 전 쇠고기 파동을 떠올리며 국거리 포장육을 싼 비닐랩의 라벨을 다시금 들여다 보려다 그만 두고 말았다. 어차피 2008년 원산지 규정이 바뀌면서 미국에서 태어나 큰 소도 우리 나라에서 6개월 이상만 보내고 도축하면 ‘국내산’ 라벨을 붙일 수 있다.

옆에 뭔가 몇 마디 더 붙는 설명을 다 읽으면 ‘토종 한우’와 ‘무늬만 국내산’을 구분하는 것도 가능하다지만, 몸살 기운에 힘이 없어 아침부터 그럴 기분이 아니다.

TV에서는 연말에 있을 대선이 어떻고 하면서 시끄럽지만, 이왕 이렇게 세상이 바뀐 것, 이제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별반 나아지는 게 있겠느냐고 경희 씨는 생각한다. 불편한 마음으로 살기 보다는 적응해서 잘 살기로 마음먹은 경희 씨는 아직도 자고 있는 언니를 깨워 아침상에 마주앉았다 .

보글보글 국 끓는 소리를 들으며  경희 씨는 으슬으슬한 몸살이 어서 나아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해 본다. 좀 비싸더라도 외국계 영리 병원에 갈까? 머리가 복잡하지만, 어차피 오늘만 출근하면 추석 연휴 휴가를 받아 고향집에 갈 텐데, 생각에 애써 즐거운 생각을 해 보려고 한다.

기분 같아서는 커다란 대중목욕탕 욕조에 들어갔다가 찜질방에서 몇 시간 있음 딱 좋을 텐데, 어느 샌가 목욕탕이며 찜질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긴 이 물값 비싼 세상에 물을 물 쓰듯 하는 업종이 버텨낼 재간이 있었을까.

못내 아쉬운 목욕탕과 찜질방 생각을 떨치고, 욕실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출근 준비를 한다. 언니는 욕실 문 밖에서 물 좀 아껴 쓰라며 잔소리를 하지만, 경희 씨는 애써 모른 척 물을 틀어놓고 머리에 샴푸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오슬오슬한데 물을 졸졸거리며 ‘고양이 세수’를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온수 좀 더 쓴다고 아픈 동생보다는 물값이며 가스값 걱정부터 하는 언니가 얄밉다. 아마 고향집에 계신 엄마 같으면 저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렇게 따지면 아깝고 무서운 게 가스요금이며 수도요금만은 아니다. 언니는 깜깜하면 무섭다며 밤이면 전기 스탠드를 켜고 잔다. 하지만, 솔직히 요새 재벌집 딸이 아니면 감히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다. 이 달에도 만만찮게 전기요금이 나왔을 걸 생각하니 걱정과 짜증이 머리카락의 샴푸거품처럼 보글보글 부풀어 오른다.

   
 
출근시간 1시간 전, 경희 씨는 복작거리는 지하철을 타고 직장으로 향한다. 플랫폼에 꽉 들어찬 인파, 공기는 환기시스템이 제대로 안 도는지 탁하기만 하다. (주)서울지하철에서는 대체 요금을 받아 어디에 쓰나 모르겠다. 예전 지하철공사 시절에는 900원짜리 기본 티켓을 끊으면 이것보다 편하고 쾌적한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3,000원짜리 표를 사고도 한참 기다려서 그전보다 더 빽빽한 지하철을 타야 한다.

그나저나 이번에 추석 연휴 끝나고 집에 올라오는 새벽에는 서울역에서 집까지 뭘 타고 귀가할지 미리부터 걱정된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서라니 이해는 가지만,  한강을 건너 여의도로 가면서 오래 전(생각해 보면 그렇게 오래도 아니건만) 명절 귀성길이나 월드컵 거리 응원 같은 특별한 날에는 지하철을 새벽 늦게까지 운행해 줬던 게 못내 아쉽다.

점심 시간이 좀 못 되어 경희 씨는 회사 근처의 병원을 갈까 하다가 좀 더 멀리 자리잡은 큰 병원을 찾는다. 한미 FTA 비준 무렵부터 널리 생기기 시작한 ‘영리 병원’이다.

접수 코너의 간호조무사에게 보험증을 건넸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의료보험증이 아니라 ‘프라임 생명보험’이 발행한 보험 증권카드다. 몇 해 전 ‘민간 의료보험’은 백지화한다고 한나라당에서는 말했지만, 시설좋은 영리병원이 따로 생기는 통에 병원도 사실상 양극화됐다.

그런 틈에서 보험사들이 내놓은 이런저런  상품들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유혹했다.
경희 씨가 갖고 있는 보험은 ‘프라임 감기·몸살·독감 보험’이다. 일 년에 열 두 번까지는 감기나 몸살, 독감을 영리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무렵, 직장 선배들이 “이제 병원도 ‘명품 병원’이 따로 있다”느니 “직장 의료 보험만 갖고는 세상살기 어렵다면서  감기 보험도 따로 들어두라”고 했을 때에는 ‘내가 뭐 병원도 명품만 찾는 된장녀인가’ 생각도 들고 매달 보험료를 낼 때면 생살을 뜯기는 것처럼 아까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 난 소중하니까. 객지 나와서 아프면 더 서럽다고 경희 씨는 생각한다.

의사의 진찰을 받고 나와 막대한 진료비청구서를 받은 경희 씨의 얼굴이 확 일그러진다. 그냥 의료보험이 되는 동네 병원을 갈 걸 그랬나 생각을  잠시 가져 보는 경희 씨. 그러나 곧 “나에겐 프라임 생명이 있으니까!”라며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린다. “이제 곧 추석인데 이런 기분을 안고 가는 건 옳지 않아!”라고 경희 씨는 생각한다.

   
<사진= 현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을 시민들은 퍼포먼스를 통해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뉴스파트너> 
 
오후 일을 좀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퇴근해 백화점에 들렀다. 아직 추석선물 보따리를 장만하지 못해서다. 물건들을 보노라면 집에 갖고 갈 선물 외에도 이것저것 사고 싶지만, 만날 월급은 제자리고 물가며 생활비는 오르는 통에, 지갑을 함부로 열기도 어렵다. 내년 봄이면 지금 언니랑 사는 집 보증금도 또 오를 텐데, 열심히 저금해야 한다.

더욱이 나중에 결혼해서 가질 아이 앞으로 만들어 놓은 ‘프라임보험 영재 펀드’를 매달 적립하는 게 여간 빠듯한 게 아니다. 요새는 방과 후 교육이니 선행학습이니 영재교육이니 들어갈 돈이 한 두 푼이 아니니 애 앞으로 미리미리 재테크를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율 보장으로 교육 정책이 바뀐 다음부터는 교육이나 입시는 사실상 돈 싸움이다.

하지만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가 옛날 평준화 시대처럼 애들은 그저 튼튼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답답해진다.

한 손에는 작은 선물 보따리를 들고 경희 씨는 언니와 고속버스를 탔다. 아얏!”,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의자를 뒤로 젖히려는 앞자리 남자 때문에 무릎에 피멍이 든 경희 씨, 앞자리 남자의 뒤통수를 노려본다. 떨어질 줄 모르는 기름값 탓에 그나마 자주 운행하지도 않는 고속버스, 좌석을 많이 뽑느라 앉으면 무릎이 앞자리에 닿을락 말락 불편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면 뒤에 앉은 나는 어쩌라는 것이냐. 조금 더 무리를 해서라도 우등고속을 탈 걸 그랬나 보다. 여기에 건망증 심한 언니는 “앗, 안방 스탠드 켜 놓고 왔네!”라고 말해 염장을 지른다.

하지만 경희 씨는 이달 전기요금은 언니더러 다 내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애써 명랑해지려고 해 본다. 그나마 대운하가 들어서서 경상도 산골짜기 고향에 배를 타고 귀향하는 세상이 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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