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화이트리스트 배제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냉전을 겪고 있다. 지소미아 등 다른 분야 교류가 모두 영향을 받고 있지만 가장 문제가 큰 영역은 역시 경제 교류다. 이런 가운데 양국 기업인들이 문제의 원만한 해결 가능성을 타진하는 모임을 열거나 화해를 촉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4~25일간 한일경제협회가 서울에서 일본 기업인들을 초청, 행사를 진행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일경제협회는 1981년 세워졌고, 앞서 1961년 설립된 일본의 일한경제협회를 카운터파트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한일경제협회의 행보를 놓고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뒤따르고 있다. 양국 간 협력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한 행보가 오해를 사기 충분하다는 것이다. 일한경제협회 쪽에 참여하고 있는 일본 기업들의 면면과 현재의 한일경제협회 수뇌부 구성 등 양쪽 모두에 문제가 제기된다.

김연수 삼양그룹 설립자는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삼양사
특히 한일경제협회 회장직을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이 맡고 있는 점에서, 삼양그룹의 지난날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삼양사 등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삼양그룹은 김 회장의 조부인 고 김연수 설립자의 친일 논란이 있다.
그는 전라북도 고부군 대지주인 김경중의 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성수 동아일보·경성방직 창업주의 동생이다(형이 큰집에 양자로 갔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사촌형제간). 교토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영 활동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국권피탈 상황인 조선은 물론, 일본까지 통틀어도 대단히 돋보이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재계 역사에서도 돋보이는 선구적인 인물인 셈이다. 1923년에 경성방직 사장이 됐고, 1924년 삼수사(현 삼양사)를 설립하고 1955년 울산 설탕공장을 준공했다.
경성방직은 당시 면방직업계 대기업 중 한국인이 경영한 유일한 기업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김 설립자는 만주국 서울주재 명예총영사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며 제국주의 일본 당국과 밀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른바 정경유착의 측면에서도 선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당연히 광복 후 친일파 처단 국면에서 그의 문제적 행보가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김 설립자는 이런 친일 행위가 기업인으로서 불가피했으며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결국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재판소 제3부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다.
◆식산은행 대출 등으로 확장? 강요에 의한 친일 아닌 '묵시적 청탁' 해석 여지
그렇다고 삼양그룹에 드리운 친일 논란이 일거에 말끔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창업주의 과오가 아닌, 일본과의 끈끈한 연관성이 후대에까지 이어지기 때문. 창업주 시대에 이미 삼양사 봉천사무소를 필두로 만주에만 6개 농장을 짓고 남만방적이라는 첫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한국인의 제조업 법인이 해외에 진출한 첫 사례로 꼽힌다.
이 같은 해외 진출 이슈를 민족 기업의 쾌거로 해석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또한 경성방직에 이어 남만방직까지 세움으로써 일본 기업들이 나눠 차지하던 방직업 시장에 돌파구를 열었다고 보는 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맥락을 볼 때 불리한 조건에서 민족 기업이 선전했다고만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경성방직에서 남만방직까지 확장일로를 택한 것은 전시통제로 조선 내 사업 확장의 기회가 막히자 이전부터 제품의 중요 수출시장이던 만주로 진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민족 자본이 이 같은 우회로로 압박을 돌파하는 것을 일제 당국이 견제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남만방직의 자본금은 경성방직보다 더 많은 1000만원이었으며 도요타에 방적기 1000대를 발주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김연수 일가의 재력이 워낙 풍부하기는 했으나, 남만방적 설립과 운영 등을 위해서는 식산은행 등 제국주의 금융기관의 도움이 더 마중물이 돼 주었다. 4000만원의 대출을 얻은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이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으로부터 설립 허가를 얻어 전시 통제를 피해 국내 시장보다 넓은 새 시장으로 찾아 떠났으며 그 과정에서 전시 경제체제의 지원을 받았다고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정경유착 논란을 키울 수밖에 없다.
이런 터에 일본과 만주국에 협력하는 모습을 연출했다면, 이를 전적으로 강요에 의한 친일로만 볼 수 있을까? 최근 삼성그룹 뇌물 및 국정농단 사건 등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개념인 일명 기업의 필요에 따른 묵시적 청탁과 그 대가로서의 뇌물 성격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2세대에 해당하는 김상홍 삼양그룹 명예회장 역시 이 만주 시절과 연이 있다. 김 명예회장은 지난 44년 만주에서 연수생 시절을 보내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아버지 김연수 설립자의 뒤를 이어 경영 지휘에 나선 김 명예회장은 삼양그룹이 제당 등 제조업에서 화학 전문 업체로 확장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그룹 중흥에도 일본과의 연관 그림자가 존재한다. 1988년 삼양사와 GS칼텍스, 일본 미쓰비시화학 등 3사가 합작해 삼남석유화학을 설립하는 등 외국 자본(일본 기업)과의 협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발전을 위해 부득이하고 일시적인 투자나 기술 협력에 그치지 않는다. 2018년 감사보고서(재무제표)에서도 이런 일본과의 끈끈한 연이 확인될 정도다. 주요 계열사 구성을 살펴보자.
삼양화성의 지분 구조는 △삼양홀딩스 50% △미쓰비시 화학 25% △미쓰비시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25%로 구성된 것이다. 2014년에 설립된 삼양화인테크놀로지는 삼양사와 미쓰비시 화학 간의 합작투자계약에 의해 각각 50%의 지분을 보유한 상황이다.
또 1988년 설립된 삼남석유화학의 지분 구조는 삼양홀딩스와 미쓰비시 화학이 각각 40%를 소유했고 GS칼텍스가 나머지 20%를 가지고 있으며 2009년 설립된 삼양이노켐인 경우 삼양홀딩스가 97.29%, 미쓰비시 상사 케미칼이 2.71% 보유한 것으로 집계된다.

도표와 같이 삼양그룹은 미쓰비시와의 다양한 협력으로 발전해 왔다. ⓒ 프라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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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미쓰비시 지분, 친일 역사 부정하며 대법원까지 재판도
일본 기업, 그 중에서도 전범 기업 논란이 큰 미쓰비시의 계열사들과 밀접한 연관을 주고 받으며 성장해 왔다고 요역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삼양그룹은 친일 논란이라는 거북한 이슈에서 민족 자본이라는 해명으로 벗어나거나, 부득이하고 불행한 과거의 역사 흔적이라고 변명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삼양그룹의 오너 일가에서는 그룹 설립자의 친일 논란에 민감해 한다. 김연수 설립자가 남긴 땅을 친일행위자 재산으로 지목, 몰수한 데 대해 후손들이 나서서 재판을 걸었던 적이 있다. 2011년 서울행정법원이 국가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판단한 데 이어 결국 2013년 대법원에서도 이 토지의 친일 재산 몰수가 정당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런 행보는 친일 과거를 부끄러워 해 묻어버리기 보다는 적극적인 재산권과 유산 보호 측면에서 생각하는 게 아닌지 의문을 낳는다. 대법원에까지 재판을 거듭하면서 과거사 포장을 시도하는 것은 적어도 노블레스 오블리제에는 결코 해당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한데, 김연수 설립자 이후 3세 경영인에 해당하는 김윤 현 회장이 한일경제협회를 이끄는 점은 문제라는 비판이 나온다. 교류와 협력을 논하는 모임의 회장을 맡은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회의 자리에서 나온 여러 참석자들의 발언 등에서 보듯 가치 판단 없는 문제 미봉책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그건 일정 부분 회장 등 지도부에도 문제가 있다. 일본이 성의있는 과거사 반성을 먼저 한 다음에 교류 회복을 하자는 설득력 있는 합의가 아니라 일본 측 논리에 기울어진 논의 결과를 냈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친일 기업인의 후손, 최근까지도 일본 기업과의 연관성으로 몸체를 불려온 기업의 후손이 여러 문제적 역사를 가진 일본 기업의 관계자들과 함께 자리를 해서 교류 회복에만 초점을 두고 외치는 모습은 보기 안 좋은 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자칫 과거에 얽매인 삼양그룹이 일본 논리를 대변하는 '아바타' 노릇을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까지도 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 회장이 꼭 이번에 이런 목소리를 내는 자리를 굳이 서울에서 열고 진행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를 임시 수뇌부로 내세워서 오히려 시간이 흘러 양국이 모두 냉철함을 더 되찾은 다음에 적절하고 객관적으로 제기했어야 더 묵직하고 설득력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