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구이람 시인이 새 시집을 펴내면서 상반기 시단에 신선한 기류를 일으키고 있다. 시집이 잘 팔리지 않는 나라지만 새로운 시집은 끊임없이 나오고 시인도 새롭게 등장하는 터라 책 한 권 더 나오는 게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이력과 작품 세계를 살펴보면 고 조병화 전 인하대학교 부총장의 '봄처럼 늘 새로워라'라는 구절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구 시인은 사실 학자로 명성이 높다. 각종 시세계를 두루 살피며 논문을 써낸 인물, 구명숙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명예교수의 필명이 바로 '구이람'이다. 특히 여성시도 많이 연구하고 여성 시인에 대한 평가와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후학들을 독려했다.
늦봄 어느 날 구 시인을 만나 끊이지 않는 작품 활동과 그 열정에 대해 들어봤다.
이번 시집 '너, 피에타Pieta'에 실린 '이태리 백화점에서' 그리고 2014년 발간된 시집 '하늘 나무' 수록작인 '21세기식 소크라테스식 대화법'과 '연두가 초록 물결로 출렁인다'를 먼저 대화 물꼬로 삼았다.
◆경제 현상도 쉬운 시로…따사롭고 쉬우면서도 새로운 언어
이태리 백화점을 찾아 둘러보면서 어중간한 값의 고급품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화자, 그는 "아임 어 코리언"이라는 말로 직원을 긴장시킨다. "최고급을 갖다 대도 살까 말까 했건만 어딜 감히?!"라는 긴 설명을 국적 소개 하나로 대체한 촌철살인의 시인데, 이를 통해 한국인의 과도한 명품 사랑을 꼬집었다.
21세기식 소크라테스에서는 사업하는 아들 덕에 달랑 노후자금인 집을 날린 노인들의 대화를 통해 "주택모기지를 해 뒀더라면!"하는 탄식을 하게 되고, 초록 물결은 생긴 지 오래지 않아 금세 망해버린 동네 가게 벽의 고전미술 작품을 보면서 신산한 소상공인의 삶과 그 속에 녹아든 예술을 노래한다.
어려운 경제 현상조차도 쉽게 간명한 언어로 풀어낸 그는 이번 시집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삼남지방 대표 절집인 울산 통도사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등 전천후 소재를 다룬다. 이전에도 그는 '웃자란 새 순 뭉텅'(작품 '미장원 풍경')이나 '참깨 쏟아지는 내음'(시 '가자, 가을아!' 속 표현) 등 쉬운 일상언어를 시어로 많이 활용해 눈길을 끌었다. 아예 '그 여자 몇 가마의 쌀 씻어 밥을 지어왔을까' 같은 제목으로 시집을 펴낸 적도 있다.
자신의 시어에 대한 호평이 많다고 하자, 구 시인은 "시는 언어의 전달에 최고 목표를 두면서 진부한 표현을 버리는 것이다. 언어의 속살결을 보려는 노력을 통해 무게와 깊이를 강화시키려 한다. 시어 선택의 정밀성 또한 중요하며 비유나 상징어를 풍부하게 잘 쓴다"고 풀이했다. 또 "인상적인 이미지 구사와 팽팽한 긴장력 속 시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시어는 학문적 용어와는 거리가 멀다. 시를 쓸 때 논리적 사고는 금물"이라고 말했다.

구이람은 하나의 암자를 뜻하며, 구명숙 명예교수의 필명이다. ⓒ 구이람 시인
대학 시절에는 김수영 시인의 작품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다는 그는 아울러 정지용 시인도 좋아한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읽고, 전자와 후자의 문학 세계가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터다.
'참여시'와 '혁명정신'으로 대변되는 불꽃 같은 삶의 김수영과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같은 회화적이고 서정적인 표현을 풀어냈던 정지용을 함께 좋아하는 건 가능한 일일까?
"김수영 시를 많이 읽고 후련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다만 김수영 작가처럼 쓴다든지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대단하다. 김수영은 시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다만 일상어를 김수영처럼, 예를 들어…비속어까지 (작품 속에 녹여내서) 쓰거나 산문적으로 쓰는 건 (개인적으로나 후배들에게) 좀 바라진 않는다"는 설명이다.
구 시인은 "순수하게, 미학적으로, 순화된 언어를 찾아서 쓰려고 한다. 공감하며 평온을 찾게 하는 언어를 찾아 쓰려는 것"이라고 스스로의 목표를 언급했다.
요즈음 새로 등장한 젊은 시인 중에 나이를 떠나 '경쟁자로 생각하는, 좋고도 무서운' 후배를 꼽아달라는 질문을 받고서는 잠시 말을 고르며 머뭇머뭇 하기도 했다. 그렇게 죽비 같이 번쩍 정신들게 하는 후배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세태를 후배 학자들 논문 지도하듯 에둘러 표현하려는 것 같았다.
"재등단을 한 번 더 할까 봐요"라며 미소짓는 구 시인의 말은 요즈음 후배들과 함께 정신차려 공부하고 쓰겠다는 스스로의 다짐도 녹아 있다. 사실 이게 대단히 무서운 말인 것이, 구 시인은 이미 한 차례 재등단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문단에 안긴 적이 있기 때문.
어중간하게 시를 쓸 것 같으면, 시인 간판만 갖고 '개점 휴업'할 바에는 다시 후배들과 경쟁해 평가받겠다는 소신을 실천했던 사례다.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모교에 교수로 자리잡았던 구 시인은 창작 영역에서도 일가를 이뤄 1999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바 있다. 하지만 돌연 2009년 '시와 시학'을 통해 재등단해 화제를 모았다.
보통 소설가들은 재등단을 시도하기도 하는데, 지방지를 통해 등단하면 대우가 아무래도 떨어지는 것으로 느껴 그런 도전을 하기도 한다. 즉, 개인 희망에 따라 다시 서울권 일간지 신춘문예나 중앙 문예지 추천을 노리는 경우가 있다.
다만 구 시인의 경우에는 10년 세월을 두고 다시금 등단 절차를 밟았다는 점에서 초발심 문제로 평가된다. 실제로 구 시인은 논문을 쓰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외에도 리더십개발원장과 박물관장 등 다양한 보직을 맡았다. 모교 숙명여대를 위해 바쁜 봉사의 시간을 살았다.
"독일에 있을 때엔 꿈도 독일어로 꾸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고 그래서 귀국하고 나니 우리 말 작품을 실컷 읽으니 좋았다"는 구 시인은 "하지만 시 창작에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는 못 했다"고 돌아봤다. "막상 교수 생활을 하다 보니 학문 세계와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우선 몰입해야 했고, 학과나 학교를 위해 봉사하는 보직도 병행해야 해서 엄청나게 바쁜 생활을 했다. 그래서 논문은 쓰지만 시는 쓰지 못 했다. 남의 시를 많이 읽고 연구하면 시도 잘 써질 것 같지만, 학문적인 논문의 언어와 시어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제 밖에 나가고 사람들 만날 일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스스로를 유배시키니, 어느 날부터 시가 내게 온다"는 구 시인. 그는 앞으로도 줄곧 시작을 이어나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공기 좋은 산 속 '암자 하나' 같은 문학 세계 추구
그는 쉽고도 명징한 언어를 갈고 닦겠다는 뜻도 재차 강조했다. "흔히 쓰는 언어라고 해서, 그게 식상한 게 아니고, 문맥에 따라 쓸 수 있다"는 설명. 구 시인은 "시어는 늘 신선하게! 때묻고 낡은 것, 진부한 것은 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구 시인은 "시인은 형상화할 때, 아주 적실하고 신선한 언어를 (사전 혹은 사람들 입말 내지 기존 문학에서) 찾아내는 게 시인의 사명이다. 그런 게 좋은 시어라고 할 수 있겠다"고 평가한다.
센스 있게 말을 만들어 내는 '조어력'은 없었던 것 같다고 자평하면서도 "대신 한 번 쓴 말을 또 쓰려고는 안 한다. 새롭게 쓰려고 노력한다. 새롭고 순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을 찾고자 노력한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는 "'난해시'는 싫어한다"고 딱 잘라 말하고 "설명이 너무 길다거나, 상징적 혹은 도발적인 말은 가뜩이나 세상이 복잡한데 안 쓰려고 한다. 사회도 어지러운데 시까지 그럴 필요 있나 생각하고 (오히려) 시어로 (세상을) 순화적으로 하고 싶다"고 희망사항을 피력한다.
그는 "시를 읽으면 편하고 누그러지게 하고 싶다. 화난 마음도 누그러지게 하고 싶은 시를 쓰고 싶다"면서 페미니즘 시도 많이 읽고 공부했지만 여성성, 모성애가 녹아 있는 시가 좋다고 말했다.

자신의 새 시집 표지를 들여다 보는 구이람 시인. ⓒ 프라임경제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필명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의 암자' 즉 일암을 소리 나는 대로 적어 여러 시집을 펴 왔고 학술적 발표는 본명으로 했다고 답했다. 구 시인은 시 쓰는 일이 '수행'이며, 알뜰히 써서 세상을 맑게 아름답게 평화롭게 노래하게 하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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