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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사記 : 한신공영 ①] 영등포서 등장한 1세대 건설사의 태동과 성장, 그리고 그림자

'신반포 신화' 주인공, 대내외 경영환경 악화 직격탄

선우영 기자 | swy@newsprime.co.kr | 2023.05.18 10:05:37

한신공영 사옥. ⓒ 한신공영


[프라임경제] 최근 건설업계는 어느 때보다 힘든 보릿고개를 지나고 있다. 국내 건설사들은 급변하는 시대 흐름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건설사記를 통해 국내외 건설을 주도하고 있는 건설 관련 업계 이야기를 논하고자 한다. 이번 회차는 '1세대 건설사'로서 자존심을 지켜오고 있는 한신공영의 태동과 역사에 대해 살펴본다. 

한신공영(004960)은 1950년 주택 건설을 시작으로 건축·토목·전기·플랜트 등 사업을 통해 굴지 종합건설 업체로 성장한 회사다. 현재까지 약 30만세대 주택을 보급하면서 국내 최고 실적을 보유한 '1세대 건설사'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주택 시장 외에도 △도로 △고속도로 △지하철 △고속철도 △광역상수도 등 국가 기간산업에 있어서도 나름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중동·중국 등에 진출, 활발한 해외 사업을 통해 국위선양에 앞장서고 있다. 

물론 1997년 외환위기(IMF) 당시 부도 사태로 법정관리 절차를 밟는 등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협성토건을 이끌던 최용선 회장이 한신공영 건설부문을 인수(2002년)하면서 현재 '건설업계 재기 성공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허름한 주택에서 시작된 73년 역사 '신반포 신화'로 입지 구축 

"한신공영 역사는 '창업주' 김형종 회장이 1950년 3월 서울 영등포 허름한 주택에서 '한신축로공업사' 간판을 내걸면서 시작됐다. 장대한 73년 역사 첫 주춧돌이 놓인 순간이다."  - 한신공영 관계자

한신공영 창업주 김형종 회장. ⓒ 한신공영


지난 1921년 경기도 양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형종 회장은 15살 무렵 상경, 철공장 직공과 건설 공사장 인부를 전전하면서 갖은 고생을 겪었다. 이런 과정에서 익힌 벽돌 조적기술은 향후 '한신축로공업사' 설립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런 노력의 시간을 걸친 김 회장은 '조적기능공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바탕으로 본격 하청공사에 몸을 담기 시작, 30세 되던 해인 1950년 한신공영 전신 '한신축로공업사'를 설립했다. 다만 회사 설립 3개월 만에 발발한 6·25 전쟁 때문에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후유증은 극심했다. 수많은 시설이 파괴됐고, 국가 경제와 산업은 황폐해졌다. 하지만 김 회장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 끈을 놓지 않고 재건 노력을 기울였다." - 한신공영 관계자

김 회장은 '처음부터 시작'이라는 각오로 사업을 재개했다. 그간 쌓은 신용과 인맥을 기반으로 1960년 직후 보일러 제작 사업을 시작했으며, 그해 8월 사명도 '한신공업사'로 교체했다. 이후 1967년 2월 자본금 550만원을 투입해 회사를 법인전환, 현재 '한신공영'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한신공영이 참여한 방림방적 전경. ⓒ 한신공영


단순 성장에 그치지 않고, 한신공영은 1970년대 초 서갑호 방림방적 회장과 교분을 맺으면서 본격 성장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실제 서 회장과의 만남 이후 당시 총 계약고가 80억원이 넘는 방림방적 공장 건설공사(1972년)와 윤성방적 건설공사(1973년)를 수주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처럼 굵직한 사업을 완수한 김 회장은 남다른 도전정신과 집념으로 '아파트 건설시장' 진출에 출사표를 던졌다. 이런 결과물이 '서울 홍익동 한신아파트(113세대)'로, 점차 중견건설사 면모를 굳히기 시작했다.

"1976년 7월은 기념비적인 날이다. 바로 증권시장에 주식을 상장, 국내 249여개 상장기업 반열에 당당히 진입한 것이다. 이를 통해 원활한 자금조달과 재무구조 개선, 투명하고 합리적 경영 여건을 조성했다." - 한신공영 관계자
 
나아가 '강남 신반포 아파트 건설'을 통해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1976년 착공에 돌입한 한신공영은 1977년 10월 1차 아파트(790세대)를 탄생시킨 이후 1996년까지 서초 반포동 일대에 2만여가구 아파트를 건설했다. 이는 '주택 명가' 명성을 획득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강남 아파트 개발을 주도한 한신공영은 '신반포 신화'를 이뤄내면서 국내 대표 건설사로 성장했다. ⓒ 한신공영


이런 괄목할만한 성과에도 불구, 한신공영은 새로운 동력 발굴을 위해 사업 영역 확장 및 업종 다각화를 적극 추진했다. 다만 이에 따른 부작용으로 회복 불능에 가까운 손실을 피하지 못했다.  

"1978년 중동 시장에 진출했지만, 당시 중동 산유국 오일 달러 부족과 더불어 사우디 알카르지 공사로 촉발된 자금난 등으로 경영 상 위기를 맞았다. 이를 계기로 회사 사정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 한신공영 관계자

당시 한신공영이 국내에서 추진한 뉴코아유통 및 윤교상호신용금고 등 프로젝트는 아쉽게도 좋은 성적표를 거두지 못했으며, 해외 진출로 인한 손실도 회사 경영에 '악화일로'를 걷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평소 당뇨와 협심증 등 지병을 앓던 김 회장마저 1983년 7월31일, 향년 62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고 말았다. 한신공영 '1세대 경영 역사'가 막을 내린 것이다.  

◆위기 롤러코스터 "2세 경영 돌입" 흑자 경영 전환부터 부도까지
 
지난 1983년 전후 한신공영은 '2세 경영자' 김태형 전무를 앞세워 사업 전략 개편과 함께 자금난 극복 체제에 돌입했다.

특히 주택 전문 기업 명성과 품질고급화 방침을 기반 삼아 '고객 중심의 안전하고 편리한 주택, 차별화된 기능을 갖춘 고급형 주택' 사업에 주력했다. 또 내실 위주 긴축경영을 추진하는 한편 수원 및 반포 등 아파트 부지 자투리땅 매각 등을 통해 유동성 강화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의 결실일까. 한신공영은 1989년 1기 신도시 분당신도시 개발에 등장한 이후 △일산 △평촌 △대전 개발에도 참여해 지역 '랜드마크 건설'하는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또 한 차원 높은 주거 문화를 선도하는 '주택전문건설기업'으로 확고한 위상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분당시범단지 한신아파트. ⓒ 한신공영


이런 성장세를 바탕으로 회사 사정도 점차 호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에는 전년 대비 2배 수준의 성장(매출 4258억원)을 이뤄냈으며, 도급 순위도 20위권 안으로 진입했다. 여기에 정부 경영정상화 지원 자금도 전액 상환에 성공, 자립 경영체제도 확립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93년 전략적 수주 체제로 변신을 도모한 한신공영은 굵직한 프로젝트도 잇달아 수주하면서 도급 순위 10위권도 이뤄내기도 했다. 

이처럼 1990년대 흑자경영으로 사세를 키우던 중 1994년 업계 침체 여파로 또 다시 '위기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광주 지역에서 함께 사업을 추진하던 '덕산그룹 부도 사태'는 한신공영에게 있어 그야말로 치명타로 작용했다. 

나날이 침체되는 건설경기와 미분양 아파트 증가로 인한 자금압박은 한신공영의 목을 더욱 옥죄어왔다. 그리고 1997년 찾아온 'IMF 외환위기'는 결국 사지로 내몰기에 충분했다. 

이에 산업계 전반에 휘몰아친 폭풍에 악물고 버티던 한신공영은 결국 5월30일 법정관리신청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6월2일 216억원의 어음 미결제로 최종 부도 처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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