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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주69시간제' 홀로 남은 아이

 

김이래 기자 | kir2@newsprime.co.kr | 2023.04.06 13:33:47
[프라임경제]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

2004년 한 카드사의 광고 카피다. 푸른 바다를 보여주며 피곤에 찌든 직장인에게 "가는 곳마다 즐거움, 열심히 일한자 떠나라"라고 달콤한 휴가를 제안했다. 중독적인 이 카피는 많은 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실제로 이 카드는 출시 5개월만에 '100만장 이상 발급'이라는 실적을 거뒀다. 이처럼 많은 직장인들은 쉼, 여행, 휴가에 열광한다. 이유는 일과 생활의 균형 '워라벨'을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어서다.

그런데 같은 해인 2004년. 공교롭게도 근로시간 관련한 제도가 새롭게 시행됐다. 주 40시간으로 근로시간을 제한하는 법이다. 근로자 1000명 이상 대기업이 대상이다. 특이한 점은 예외조항이다. 노사가 합의하면 12시간까지 연장할 수 있다. 여기에 토요일과 일요일 각각 8시간씩 총 16시간 근로가 추가로 허용돼 '주 68시간'근로관행이 여기서 시작됐다.

시간이 흘러 2018년. 근로시간은 다시 조정됐다. 바로 '주52시간제'다. 과로사회로 번진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워라밸 차원인데, 중소기업을 비롯해 IT, 게임업계, 스타트업, 제조업 등은 직격탄을 맞았다. 납기일에 맞춰 야근이 많았던 산업은 더욱 아우성이다. 심지어 게임 개발자들은 '퇴근' 버튼을 누르고, 인근 카페에서 일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가 고심해서 내 놓온 것이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이다.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기존 1주일에서 1달, 1분기, 1반기, 1년으로 넓히자는 게 골자다.

산업구조의 특성에 따라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하자는 정부의 취지는 일견 좋아 보인다. 하지만 이론상으로 보면 주당 최대 근로시간은 69시간으로 늘어난다. 이는 2004년 주68시간보다 더 많이 일하게 되는 셈이다. 시대를 역행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일을 마치고 다음날 출근하기까지 11시간 연속휴게시간이 보장된다. 24시간에서 11시간을 제외하면 13시간이다. 이 중 4시간마다 30분의 휴게시간을 빼면 하루 근로가능 시간은 11시간 30분이다. 만약 일요일을 쉬고 6일을 근무한다고 가정하면 주당 최대 69시간이 나온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69시간제 근무표'처럼 '출근-퇴근-기절'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외신들도 근로자들의 건강권에 치명적일 것이란 우려로 대한민국을 '과로사회'라고 비판했다. 여론의 날선 비판에 정부는 "바쁠 때는 일주일에 최대 69시간까지 일을 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되, 대신 바쁘지 않을 때는 장기 휴가 등을 이용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나눠 쓰는 유연근무제"라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좀처럼 논란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자 고용부 입법예고 8일 만에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 "주 60시간 근무는 무리라고 판단된다"며 보완을 지시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오락가락 행보에 뾰족한 해결점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지난달 23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고개 숙여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하면서 일단락 됐다. 

일각에서는 근로 시간은 법제화하면서, 휴가는 기업과 근로자 자율에 맡긴게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고용정책의 핵심인 '유연근무'가 오히려 '야근을 조장하는' 정책으로 퇴색된다는 비판이다. MZ노조들도 유연근무에 대해 "근무시간은 늘어나지만, 정작 휴가는 다 챙기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고용노동부가 '2021년 일가족 양립 실태조사'결과에 따르면 2021년 연차유급휴가 소진율은 평균 58.7에 불과하다. 현재 주어진 연차휴가도 다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장기휴가로 제주도 한달 살기를 할 수 있는 근로자가 몇이나 될까 의문이다.

상황이 이러자 고용부 장관을 비롯해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기업들은 "눈치 보지 말고 연차휴가를 사용하라"고 권고하고 나섰다. 하지만 기업문화는 한순간에 바뀌기 힘들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법으로 정해진 연차휴가를 쓰기 위해 상사와 동료의 눈치 보기에 바쁘다. 15일~30일 장기휴가를 다녀왔을 때 내 자리가 남아있을지도 우려다.

여기서 다시 묻고 싶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마음 놓고 휴가를 가려면 기업과 근로자, 정부 모두의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그리고 정부도 장기적 관점에서 정책방향을 바라봐야 한다.

고용과 저출산 정책, 얼핏보면 각각의 다른 정책으로 보인다. 그런데 근로자는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다. '유연화'라는 프레임을 씌어 근무시간을 늘리는 것은 저출산 시대를 오히려 부추기는 모양새다. 부모를 기다리며 밤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혼자 남은 아이. 그런 아이들이 없어야 한다. 부모에게 시간은 어떤 지원금보다 값진 이유다. 정부가 내놓은 각각의 정책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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