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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루의 언어 에세이] 평가를 강요받는 사회를 향한 창작자의 독백

 

이다루 작가 | bonicastle@naver.com | 2022.12.05 15:17:30
[프라임경제] 소위 평가는 평가자와 피평가자, 평가를 인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존립한다. 그 같은 평가에서 인정받음과 인정받지 못함의 양 갈래에서 창작자의 이력이 나뉘게 된다. 창작물이 평가의 창작물로서 인정받지 못하면 창작자는 이력도 없고 대우도 없다. 이력이 명시되는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게 된다. 그것은 곧 몰락과 다름없는 일이다. 

만약 평가를 받으려는 자가 없다면 평가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평가자는 피평가자의 종속변인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의 평가는 피평가자가 평가자에게 종속되는 시스템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피평가자는 평가자의 주관적인 시선에 귀속된 채 평가를 받고, 그런 경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어쩌면 힘을 건네는 자와 그 힘을 모으는 자와의 관계인 듯 위와 아래, 선과 후 혹은 갑과 을로 존재한다. 그런 관계의 저변에는 꺼지지 않는 인정의 욕망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반면에 평가조차 받지 못하거나 탈락한 자는 고립되거나 저편에서 움츠려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들을 '재주 없음'으로 단정 할 수 있는가. 정약용의 시 <혼자 웃다(송재소 옮김)>의 몇 구절을 소개한다.

높은 벼슬 한 사람 어리석기 마련이고
재주 있는 사람은 그 재주 펼 데 없네

(중략)

달이 차면 구름을 자주 만나고
꽃이 피면 바람이 불어 날리네

모든 사물 이치가 이와 같은데
아는 사람 없음을 홀로 웃노라

그의 시에서 재주 있는 사람이 그 재주를 펼 데 없음은 재주가 공간과 사람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말마따나 재주를 기르는 데에만 열을 쏟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평가자의 눈에 들기 위해서 빛나 보이면 될 일이다. 차라리 목소리가 크다면, 몸집이라도 거대해지면 그들 눈에 쉽게 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지 오늘날은 저마다 재주를 기르려는 생각보다는 제 모습을 닦고 보여주는 일에만 열중이다. 그렇게 저마다의 재주가 사라지면 머지않아 사람들은 똑같은 일만 하게 될 것이다.
 
재주를 기르는 일은 정체성을 얻는 과정이라 할 수 있고, 각자의 재주를 펼치는 것으로 사회는 조화로운 모습으로 확장될 수 있다. 정체성을 아는 것은 인생을 제대로 사는 방법이 된다. 내가 나를 잘 알면 자신의 변화도 금방 감지해낼 수가 있다. 왜 슬프고 우울하고 고통스러운지 그 감정의 원인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그뿐 아니라 정체성이 독창성으로 발전해 창조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힘, 창작과 발명을 가능케 한다. 

결국 나만의 이야기가 곧 자신의 재주이고, 정체성이며 창작이다. 옷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에게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도 음악을 작곡하는 작곡가에게도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나만의 이야기'는 항시 좋은 소재가 된다. 

그런 작품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목적지에 다다른 사람만이 만들어내는 고유의 결과물로 통한다. 그와 같은 단서는 여러 창작자들의 작품에서 또 하나의 모멘트가 되기도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질문이 물건으로 탄생했고 선율로 탄생했고 혹은 활자로 탄생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질문에 대한 답을 일찌감치 얻은 자들은 자신만의 분야를 이룩했고, 저만의 창작물을 창조했다. 우리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감사함을 느끼고 살아가야만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창작의 업은 인간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인간의 존엄성을 우선하는 사회가 돼야 하듯 저마다의 재주와 정체성의 존엄도 마땅히 존중받아야만 한다. 창작물이 평가자에 의해 고립되거나 하찮게 여겨질 이유는 없다. 그러니 재주를 드러내고 펼치는 일련의 작업에 순위를 매기는 평가도 그만 됐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창작자가 피평가자의 인식에서 스스로 벗어나야지만 평가받지 않는 세상이 도래할까. 그래서 이전의 평가에 의해 낙오된 창작물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될까. 그 같은 세상이 지금, 여기였으면 좋겠다. 정체성을 드러낸 누구나가 인정받고 어우러지는 공간이 바로 여기라면 참 좋겠다.


이다루 작가  
<내 나이는 39도> <기울어진 의자> <마흔의 온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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