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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루의 언어 에세이] 오늘도 멜랑콜리한 이들에게

 

이다루 작가 | bonicastle@naver.com | 2022.06.13 17:05:09
[프라임경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는 "멜랑콜리야말로 무사태평한 웃음 속에서 메아리치는 이 시대의 질병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혹여 멜랑콜리가 자신의 기분을 저미기라도 하면 질병에 걸린 듯 저마다 처방약을 찾기 위해 분주하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삶이 파괴될 것처럼 조급함이 앞서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멜랑콜리한 기분을 배척하는 일은 마치 행복을 찾는 지름길인 것만 같다.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레나타 살레츨(Renata Salecl)도 행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Be happy' has become a societal imperative. if you aren't, you have failed.('행복하라'는 사회적 명령이 됐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당신은 실패한 것이다.)"

어쩌면 행복을 전시하는 작금을 사는 우리에게 '행복'은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가져야 할 의무가 된지도 오래다. 누구든지 세상의 낙오자가 되기 싫다면 반드시 멜랑콜리를 걷어내야 하고 행복을 좇아야만 한다. 때문에 살아있는 의식 속에서 멜랑콜리는 허락되지 않는다. 외려 그것을 외면하고 핍박해 결코 드러내지 않게 시약불견(視若不見)할 뿐이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명령처럼 우리는 수시로 행복해야 하고, 시종일관 무사태평한 웃음을 지어야 하므로.

행여 누군가 멜랑콜리의 기운이라도 새어 나오면 모두들 촉을 세워 견제한다. 그 우울이 내게 전염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지금 만연하는 멜랑콜리는 우리에게 숙제와 같은 어쩌면 전염병과도 같은 극단적인 거부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정신적인 문제로 치부돼 음울하고 가망 없는 존재로 각인될까 봐 우리는 행복을 향해 필사적으로 미소를 짓고 총총히 오늘을 걷고 있다. 

그럼으로써 행복이라는 원대한 가치를 좇으며 사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인 목표로 간주된다. '우울하지 않을 것' 또는 '우울 속으로 침잠하지 않을 것'이 기준이 돼 행복의 굴레 속으로 스스로를 옭아맨다. 날마다 기쁘게 타오르고, 수시로 만족과 재미를 느끼는 것이 세상이 제시한 표준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자기기만이 아닐까.

멜랑콜리(melancholy)는 사전적 정의로 우울 또는 비관주의에 해당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칭한다(출처 : 우리말샘). 

여기서 주목할 것은 멜랑콜리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분노나 짜증과 같이 터부시 되거나 견제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멜랑콜리는 인간의 내면에 저절로 생겨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일상적이고도 보편적인 감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현대사회의 반(反)멜랑콜리 의식에 대해 반기를 들고 싶다.

우리는 날마다 호흡을 하며 살아간다. 호흡은 존재의 가치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과정만으로도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또 호흡은 그리스 신화의 프시케(Psyche)의 어원으로, 영혼을 상징한다. 즉, 호흡은 영혼이기도 하다. 

영혼을 실은 호흡은 저마다의 악보를 그리며 생(生)의 음을 생성하고, 시간에 따라 자연스레 흘러간다. 높거나 낮게 때로는 거칠거나 부드럽게 생(生)의 시절이 악보를 따라 끊임없이 흐른다. 그곳에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있듯 멜랑콜리도 감정이라는 구역 안에서 같은 결을 이루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멜랑콜리는 원초적인 자아이기도 하다. 거친 세상에서 자아의 탄생은 일단 멜랑콜리적이다. 혼자서 살 수 없는 인간의 특성도 멜랑콜리하며, 그 점을 환기시키려고 서로 관계를 맺고 원치 않는 조울 반응을 얻기도 한다. 

또 멜랑콜리할 때면 적잖이 당황하며, 스스로의 모습을 부정하곤 의도적인 '즐거움'을 찾는 여정을 반복한다. 곧장 힐링 스폿을 찾고, 힐링 아이템을 사며 자아를 위로한다. 당장은 멜랑콜리로부터 벗어날지언정 결국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잘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가 자아상실의 고통을 오롯이 느끼지 않아서다. 멜랑콜리-원초적인 자아-를 외면한 탓에 본질적인 슬픔이 반복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1892~1940)은 "근심·걱정은 자본주의 시대에 적합한 정신적 질환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멜랑콜리를 시대상의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단지 질문을 갖게 하고 심연의 순간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분'의 부분으로서 말이다. 

멜랑콜리가 의욕과 동력을 아무리 가지려 해도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깊이와 멈춤의 소용돌이를 이끌기 때문일 것이다. 깊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멈춰 서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또한 깊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생도 자아도 깊이 이해하려면 멜랑콜리적이어야 한다. 인생에서는 때때로 움직임을 멈추고, 깊이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멜랑콜리를 대하는 꽤 괜찮은 방법이지 않을까.


이다루 작가  
<내 나이는 39도> <기울어진 의자> <마흔의 온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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