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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헌법학자 미노베, 정무직공무원 정종섭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15.09.15 09:31:54

[프라임경제]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원래 관료 출신은 아니다. 고시 합격 후에도 법조계로 나가지 않고 공부에 뜻을 둬 헌법 연구를 한 인물이다. 서울대 출신인 그가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유는 새 학문 트렌드에 마음을 뺏겼기 때문이다.

그 당시 치열한 논쟁의 불을 지폈던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가 당시 신촌에 둥지를 틀고 있어 다른 학교 출신들 중에도 연세대 대학원에 진학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원로학자 허 교수의 학문적 적통을 잇는 대표적 제자로 그를 꼽아도 큰 오류는 아닐 것이다.

허 교수는 헌법이 갖는 규범적 효력의 본질은 주권자의 결단이 아니라 동화적 통합의 기초가 되는 공감적 가치의 실현에 있다는 '동화적 통합이론'을 제시했다. 이 같은 첨단 이론 제시는 헌법학계의 거목 김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평생 쌓아올린 아성에 버금가는 학문적 족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당시 많은 학자들은 고(故) 권영성 前 서울대 교수처럼 결단주의 헌법관에 기울어 있었다. 그래서 통합론적 헌법관을 뿌리내리려는 싸움에 총명하면서도 부지런한 제자 군단이 필요했고, 정 장관이 은사의 책에 버금가는 자기 저서를 저술하는 등으로 이 역할을 기대 이상을 해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정 장관이 이런 뛰어난 저술과 연구 능력에도 막상 그의 주장 내용을 입각 이후에 청와대에 제대로 진달했는지에 의문이 있다는 점이다.

지난 6월 박근혜 대통령은 여야 합의에 따라 통과된 국회법 개정안을 헌법에 위반된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거부권 행사에 대한 주무 관련 부처 장관이었던 그는 이런 청와대 행보에 제동을 걸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저서 '헌법학원론'에서 이런 박 대통령의 행보가 있을 경우 이는 문제라는 시각을  드러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뭐 사람이 모든 일에 소신대로 모난 돌 노릇을 할 수는 없으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이어서 그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총선 필승' 운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선거 중립성을 엄중히 역설하고 다녀도 모자랄 처지에 헌법을 연구해본 그가 이랬다는 점에서 야권은 경악했다. 결국  한정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14일 국회 의안과를 방문해 "정 장관은 공직자의 선거 중립 의무를 어기고 공직선거법과 공무원법을 어겼다"는 취지로 탄핵소추안을 제출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다.

이런 와중에 미노베 다스키치라는 오래 전 일본 학자가 겹쳐 떠오른다. 이른바 '천황기관설'을 제시했다가 보수파 정치인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고 제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탄압받았던 인물이다. 

이 학설은 천황을 국가 최고 기관으로 설정한 것이다. 당시 보수파들은 감히 지엄한 천황과 그 가문을 일개 기관 운운했다며 그를 매장시키려 들었다. 이런 학술적 굴욕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흘러가는 신호탄 중 하나였다. 온갖 수모에도 미노베 교수는 꿋꿋하게 살아남았고, 전후에도 학문 연구를 이어 나갔다.

대저 학자란, 이런 인물에게 적합한 단어다. 정 장관은 학문적으로 출중한 능력을 보여 줬으나 막판에 외도하러 나온 중에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버렸다.

흔히 장관을 정무직공무원이라 한다. 담당 업무의 성격이 '정치적 판단'이나 정책 결정을 필요로 하는 차관급 이상의 중앙부처 공무원과 고급 지방공무원을 말한다고 한다.

특정 정파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가 그 발언을 진정 '덕담' 정도로 생각하진 않았으리라. 아마도 정무직공무원으로 그를 임명해준 박 대통령에 대한 인간적 의리 때문에 그런 '정치적 판단'을 한 것이고 그게 장관된 이의 고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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