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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해부] 금호아시아나 ① 태동과 성장…풀리지 않는 '승자의 저주'

대표적 '형제경영' 집단, 무리한 M&A에 발목…'형제의 난' 이전투구 여전

이보배 기자 | lbb@newsprime.co.kr | 2015.02.06 10:22:59

[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상황과 경영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몰락의 나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내로라하는 세계적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산업을 이끄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파악해보는 특별기획 [기업해부] 이번 회에는 금호아시아나 1탄 태동과 성장에 대해 살펴본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故 박인천 창업주가 1946년 택시 두 대로 광주택시를 설립, 운송업에 뛰어들면서 태동했다. 마흔 여섯의 나이에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한 그는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노력과 인내로 기업인의 큰 뜻을 펼쳐 보이리라 결심했다.

◆박인천 창업주, 택시 두 대로

박 창업주는 집념과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1948년 '광주여객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67년 12월 광주-서울 간 직통버스 첫 운행을 성공시켰다. 이후 1960년 금호타이어가, 1971년에는 금호석유화학(前 한국합성고무공업)이 설립됐다.

이어 박 창업주는 1972년 10월 금호실업을 설립하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듬해 1월1일 박 창업주가 초대 그룹회장에 취임하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출범했다.

1973년 그룹 출범 당시 故 박인천 창업주가 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금호아시아나

당시 장남인 박성용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호실업 사장으로 차남 故 박정구 전 회장은 광주고속 사장으로, 삼남 박삼구 현 회장은 금호타이어 사장으로 막중한 역할을 맡았다.

이후 금호아시아나는 고속과 타이어 성장을 발판삼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금융, 건설, 철강, 전기업 등에 잇따라 진출, 1977년에는 12개사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1984년 6월 타계한 박 창업주는 육상운송에서 항공운송에 이르기까지 국내 운송사의 큰 획을 그었고, 무엇이든 해내고야 만다는 '집념의 사나이'로 회자된다.

박 창업주는 세상을 떠나기 전 2세 경영을 대비해 원칙을 세웠다. 아들만 경영권을 상속하는 것으로 제한했고, 그룹 회장직은 형제간 합의에 따라 결정하고, 주요 사안은 합의와 다수결로 해결하되 최종 결정권은 손윗사람에게 줬다.

이후 막내 박종구 초당대 총장(前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을 제외한 네 형제는 창업주의 유훈에 따라 금호그룹을 경영해 왔고, 이 과정에서 65세에 금호그룹 회장직을 물려준다는 원칙도 세웠다.

박 창업주의 뒤를 이어 2대 회장에 취임한 장남 박성용 전 명예회장은 아시아나항공을 출범시키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을 국제적 기업으로 일궈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8년 정부로부터 제2민항 설립업체로 선정되는 경영능력을 발휘했고, 계열사 간 합병과 비수익 사업정리 등 과감한 구조조정을 진행한 박성용 전 명예회장은 65세가 되던 1996년 바로 아래 동생인 박정구 회장에게 스스로 회장직을 물려줬다.

당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형제간 경영권 승계는 여타 대기업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로 재계 화두가 되기도 했다.

형을 이어 그룹을 이끌어 오던 박정구 전 회장은 2002년 폐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떴고, 박정구 전 회장 역시 아들이 아닌 동생 박삼구 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줬다. 공교롭게도 당시 박정구 회장의 나이는 65세로 금호아시아나의 '65세 형제경영'의 전통을 잇게 됐다.

◆무리한 인수전, 어긋난 형제애

박삼구 회장은 2002년 9월 금호아시아나그룹 4대 회장으로 취임했고, 당시 박찬구 금호석화 사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박삼구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2010년 재계 5위에 올라서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금호아시아나그룹 본사 사옥. ⓒ 금호아시아나

2006년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박삼구 회장은 항공과 타이어를 글로벌기업으로 육성하며, 석유화학과 금융을 기반으로 건설을 주력 업종으로 키우고자 했다.

이때 시공능력 2위로 평가 받던 대우건설이 매물로 나오자 박삼구 회장은 망설임 없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대우건설 인수에 성공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당시 재계 순위가 3계단이나 급상승해 8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대우건설 인수가 비운의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2008년 대한통운까지 인수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자금난으로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 대안통운 인수에 부정적이었던 박찬구 회장은 당시 금호석화를 인수에 참여시키지 않았고, 이는 박삼구-박찬구 회장 간 '형제의 난'을 촉발시켰다.

결국, 코너에 몰린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9년 6월 산업은행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 대우건설 재매각을 발표했다. 당시 박찬구 회장은 금호산업 주식을 팔고 금호석화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룹 위기 상태에서 금호석화만이라도 살려보자는 의도였다고 설명했지만 박삼구 회장은 동생이 그룹의 경영권을 노린 행위라며 분노했다.

박삼구 회장은 같은 해 7월 금호석화 이사회를 열고 박찬구 회장을 해임하면서 자신도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12월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는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금호석유화학은 채권단 자율협약을 맺었다.

우애 좋기로 소문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형제경영이 무너지면서 형제의 난이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다.

◆경영정상화에도 끝나지 않는 '형제갈등'

2010년 2월 채권단이 금호석화를 그룹에서 분리 경영키로 결정한 뒤 박찬구 회장은 금호석화 회장으로 복귀했고, 박삼구 회장 역시 같은 해 11월 그룹 회장으로 돌아왔다.

박찬구 회장이 금호석화를, 박삼구 회장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을 맡아 분리 경영하면서 각자 경영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안타까운 점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소송과 보복전이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2006 대우건설 인수때부터 삐걱거리던 박삼구(왼쪽)·박찬구(오른쪽) 회장은 2008년 대한통운 인수와 유동성 위기 이후 등을 돌렸고,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형제의 난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 프라임경제

금호석화는 2011년 공정거래위원회에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그룹 계열사에서 제외해 달라고 신청했고, 박찬구 회장은 그해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불구속 기소됐다. 금호석화 측은 이 수사가 박삼구 회장 측 제보로 진행됐다고 보고 있다.

2013년 9월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금호석화와 그 계열사가 '금호' 상호를 쓰지 못하게 해달라는 상표권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2월에는 박삼구 회장의 개인 일정을 빼낸 혐의로 박찬구 회장의 운전기사를 고소하는가 하면 4월에는 금호석화를 상대로 아시아나항공 주식 매각 관련 이행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어 금호석화는 박삼구 회장의 아시아나항공 사내이사 선임을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과 함께 집무집행 정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급기야 지난해 9월 박삼구 회장을 배임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전적은 양측 모두 1승1패 무승부다. 금호석화가 박삼구 회장의 아시아나항공 대표이사 등의 직무 집행을 정지해 달라며 제기한 직무정지 가처분 건에 대해 서울고법은 금소아시아나의 손을 들어줬다. 금호석화의 신청을 두 차례나 기각한 것.

금호석화가 보유 중인 아시아나항공 주식을 매각하라는 금호아시아나의 청구에 대해서는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고, 상표권 소송은 당초 6일 1심 판결이 나올 예정이었지만 판결 선고가 늦춰졌다.

워낙 크고 작은 소송이 많이 걸리기도 했지만 메인이벤트는 박찬구 회장이 박삼구 회장을 배임 혐의로 고소한 것에 대한 검찰 조사 결과다.

박찬구 회장 측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이 2009년 직면하고 있던 유동성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계열사를 동원한 이른바 '기업어음(CP) 돌려막기'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당시 발행한 CP는 총 4270억원으로 이를 아시아나항공과 금호석화, 대한통운 등 12개 계열사들이 모두 매입했다는 것.

금호석화는 2012년, 금호산업과 아시아나항공·금호타이어는 2014년 각각 자율협약과 워크아웃을 졸업했음에도 형제의 난은 계속되고 있는 형국이다. 형제간 우애 좋기로 소문났던 금호 가문이었지만, 이젠 옛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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