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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포전투 아시나요"…'순천과 이순신' 발간

 

박대성 기자 | kccskc@hanmail.net | 2013.10.15 10: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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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임진왜란(1592~1598) 최후의 '조.명.왜' 삼국 혈전지인 전남 여수 장도(노루섬)와 순천 신성포 왜성(倭城) 일대의 역사유적지화가 논의되는 가운데 '신성포전투'를 조명한 서적이 발간돼 화제다.

관음포해전(노량대첩)에서 전사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전황을 알기 위해서는 순천왜성과 신성포해전의 '조.명.왜' 삼국의 치열한 수륙혈투전이 일어난 배경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단행본의 제목은 '순천과 이순신(도서출판 아세아)'으로 사단법인 순천지구 이충무공 유적영구보존회가 발간했다.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는 통영,한산도,남해, 여수 등지에 집중돼 있으나 순천 신성포 일대가 이 충무공의 전적지였다는 사실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왜성은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지역에 29곳이 집중돼 있으나, 전라도에는 유일하게 순천에 왜성 한곳이 존재한 것도 특징이다. 물론 지금은 성곽 석축흔적만 남아 있다.

순천왜성은 정유재란때 퇴각을 엿보던 왜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의해 축조된 일본식 성곽으로, 왜성 또는 왜교성(倭橋城)이라고도 부른다.
 
소서행장 휘하 병력들이 단기간(3개월)에 축조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순천 백성들을 동원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예교포(曳橋浦)'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예교, 예교성, 왜교, 왜교성 등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린다.

왜교성에선 1598년 9월20일부터 60여일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조-명 연합수군'은 왜성에서 2㎞쯤 떨어진 장도에 머물면서 왜군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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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순천 왜교성곽. = 박대성기자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큰 전쟁으로, 이 가운데서도 순천 예교성전투는 종전지로서 의미가 크다고 책에는 씌여있다.
 
순천왜성을 비롯해 충무사와 검단산성 등의 유적지는 순천에 남아 있는 소중한 임란전적지. 특히 최후 전쟁인 관음포해전(노량대첩)도 결국은 해룡면 신성포 앞바다 해전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더불어서 이순신 장군이 활동했던 곳이 전라좌수영(여수)이지만, 이 곳 또한 '순천도호부'의 관할이였다는 점에서 순천과는 뗄레야 뗄 수 없다. 당시 기록에는 충민사(忠愍祠.여수 덕충동)가 순천충민사로 기록돼 있는 것도 순천도호부의 광활한 관할면적을 가늠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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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 위패가 모셔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충무사. =박대성기자.

순천왜교성은 패전이 임박한 일본 소서행장 일당 1만3000여명이 주둔했고, 왜성과는 2.5km 떨어진 검단산성은 소서행장 일당격멸을 위해 중국 명(明)나라 유정 제독이, 신성포 '충무사'는 임란이 끝나고 주민들이 왜적의 악귀를 쫓아낸다며 세운 사당으로 이순신장군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이충무공유적보존회 임동규 사무국장은 "이순신장군이 남해 노량해전(관음포)에서 전사했다는 장소만 부각시킬 뿐 왜 여기서 전사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며 "임진왜란의 가장 큰 전투가 예교(신성포) 전투였는데 충무공 밑에서 낙하에 계셨던 순천 백성 수천명의 희생사나 예교전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현재 임란 유적지인 해룡면 신성포와 장도 일대는 율촌산단이 조성돼 대부분 매립된 상태로. 예전의 치열했던 해전의 흔적은 사라졌다. 이를 안타까워 한 지역의 정치인들이 '왜성전투 역사공원 조성'을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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