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트
  • 메일
  • 스크랩
  • 글자크기
  • 크게
  • 작게

[토요기획] 한국증시 110년 그 파동의 역사 <4>-증시에 뭉칫돈…한국 첫 증권주 파동 발생

1921년 저금리로 경취주 투기자본 결집 1년새 12배 폭등

임경오 기자 | iko@newsprime.co.kr | 2005.10.22 11:02:50

지난 3주 동안 최초 증권시장이자 미두 선물거래소였던 인천미두취인소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선물거래소였던 관계로 지면의 대부분을 선물거래에 관해서만 다뤘지만 이번 주부터는 주식거래를 중심으로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증권시장의 역사를 기록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물론 수많은 투자자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던 각종 증권파동이 자세히 실리게 되며 이 과정에서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일부 충격적인 사실들이 새롭게 기술될 예정입니다. 네티즌 여러분의 많은 질책과 충고 바랍니다. /편집자/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의 주가를 현재에 맞게 재구성한 그래프. 1920~1921년 폭등한 모습이 보인다.
 
1897년 국내 첫 주식회사 한성은행 설립

 우리 나라 최초의 주식회사로는 1897년 2월19일 설립된 한성은행(현 조흥은행)이 꼽히지만 대한제국 시절 설립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를 꼽는 견해도 있으며 심지어 상업은행의 전신인 천일은행이 1896년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뉴욕서 발견되기도 해 최초 주식회사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기네스협회의 기록은 여전히 한성은행을 한국 최초의 법인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천일은행은 1899년1월30일 설립된 것으로 공인되고 있다. 물론 최초의 은행은 인천미두취인소가 설립한 해와 같은 해인 1896년에 세워진 조선은행이다.

김종한 초대 은행장을 포함한 9명의 선각자들이 순수 민족자본을 모아 설립한 한성은행은 일제의 경제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세운 민족은행으로 이때까지 일반인들에게 은행은 생소한 곳이어서 첫대출이 쉽사리 이뤄지지 못하다가  ‘당나귀 대출’이란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남겼다.

한성은행 첫 대출담보물은 당나귀

서울에 물건을 사러왔다가 자금이 바닥난 한 대구상인이 당나귀를 담보로 내밀고 대출을 신청한 것이다. 은행측은 격렬한 내부토론을 벌인 끝에 당나귀를 담보로 돈을 대출해줬다. 이 당나귀가 한국은행사 대출담보 1호란 시각도 있지만 한해 전에 조선은행이 설립됐기 때문에 대출담보 1호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채는 1905년에 발행됐지만 최초의 주식거래는 1908년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인 다나카(田中友吉)에 의해 시작됐다.

1905년 한일간에 을사늑약 체결이후 일본자본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일본주식을 갖고 있던 일본인들이 현금으로 환전해 쓰기 위한 필요성에서 유가증권 현물중매젼을 세운 것이 우리나라 주식거래소 효시이다. 선물거래소 효시는 이보다 12년 앞선 인천미두취인소임은 물론이다.

김응룡씨 한국인 최초 주식중매점 개설

그리고 1909년엔 김응룡씨가 한국인 최초의 주식 중매점을 열었다.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이 이뤄진 후 일제는 대기업 경영을 시작했고 이때부터 한국에서도 주식회사제도가 급성장, 1911년에 85개사에 자본금 1379만원에서 1919년엔 251개사에 자본금 1억106만으로 크게 불어났다.

이에 따라 유가증권 현물문옥(問屋)도 크게 늘어났으며 1911년 4월엔 20개점으로 구성된 ‘경성유가증권현물문옥조합’이 결성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전장과 후장이 개설됐으며 시세표도 만들어졌다. 이 곳에선 하루평균 2000~3000주가 거래돼 비교적 활발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이후 투기 거래로 인한 결제불이행 사태로 인해 해산됐다.

1919년 제2의 유가증권현물조합이 재결성됐지만 1920년 우리나라 최초로 공식허가된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주)’이 설립되면서 다시 해산됐다.

공식 허가 최초 주식거래소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주)’ 출범

   
 
                   1920년 출범당시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 건물.
 
유가증권시장 설치운동이 1910년부터 활발했지만 식민지 기반이 확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자본의 성장을 우려한 일제는 10년동안 설립을 허가하지 않다가 시장규모가 급속히 커진데다가 1919년 3.1운동후 문화정책으로 전환하면서 1920년 1월(5월에 설립됐다는 주장도 있음)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출범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한국인 9명을 포함해 26명이 발기에 참가, 그해 4월 주식 현물시장 조항(4호시장)을 신설했으며 일본의 인기주와 국내회사 30여개 종목을 대상으로 그해 8월14일부터 역사적인 첫거래를 시작했다. 이때 자본금은 300만원(圓)이었다.

개장당일은 오전에만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27개사 37종목에서 거래량이 3040주에 달했으나 당시 실물경기가 위축되고 있을 때여서 곧 침체로 돌아섰다. 이같은 상황은 9월에도 이어져서 일평균 거래량이 1100주에 불과했으며 하루 입장객도 20~30명으로 개장초기에 비해 10분의 1로 대폭 감소했다.

이에따라 11월까지 거래종목은 59개로 늘었으나 개장이후 이때까지 누적 1000주 이상 대량 거래 종목은 7개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경취주가 전체 거래량의 76%를 차지했다.

초창기 3일거래방식따른 현물 인도 어려워 침체

11월까지 장이 침체된 이유는 당시 모든 거래가 투기 억제라는 명분아래 거래 쌍방이 3일내에 주식과 대금을 경취에 제공하고 수도결제를 마쳐야만 종료되는 극히 제한적인 방식을 채택함에 따라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주(=경취주)를 제외하곤 거의 매매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중매인들은 수도기간을 3일에서 한달로 연장하고 이 기간내에는 주식의 전매와 환매를 허용하는 한편 결제도 전매와 환매차액만을 지불하도록 하고 나아가 거래활발을 위해 공매매을 인정하자는 내용의 거래제도 개선안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3일 결제방식으로는 거래할 주식을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경취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덧붙여졌다.

경취는 중매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조선총독부에 정식 건의했고 이에 총독부는 그해 12월부터 원격지 주문에 한해 수도기간을 15일로 연장했다. 이에따라 하루 거래량이 11월까진 하루 1257주였다가 12월에는 하루 3791주로 3배이상 급증했다.

실물경기 침체로 금리하향 증시에 자금 유입

이무렵 오랜 실물경기 침체로 자금수요가 줄면서 유휴자금이 늘고 금리가 하향세를 나타내자 증시로 뭉칫돈이 몰리면서 거래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에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면서 간접투자상품으로 뭉칫돈이 유입, 기관의 힘으로 신고가 행진을 벌이고 있는 현증시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역사의 반복성을 엿볼수 있다.

이처럼 거래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다음해에는 한국증시 최초 증권주 파동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원래 증시 운영에는 유가증권의 취득자금을 대여하고 증권을 담보로 대출하는등 유가증권의 발행과 유통을 원활하게 해줄 유가증권금융기관이 필수적이었으나 당시 경기침체로 인해 여의치 않다가 1920년 12월 경취 중역회와 주주총회에서 이같은 기능을 가진 증권신탁회사설립을 결의했다.

그리고 1921년 1월엔 ‘경성증권신탁주식회사(=경신)’를 설립키로 한후 이 경신을 매개로 한 단기거래를 도입키로 했다.

단기거래 도입후 거래 급증 경취주 미인주 등극

단기거래란 원래는 매매쌍방이 계약 다음날까지 주식과 대금을 경취에 제공하고 수도를 마쳐야 하는 현물거래였지만 어느 한쪽이든 익일수도를 이행할수 없을 때에는 쌍방 협의아래 경신에서 주식과 대금을 대여 입체받아 수도결제를 마치고 그 때 발생한 중매인과 경신사이의 대차관계는 추후 당사자끼리 결제하도록 허용한 제도였다.

따라서 중매인들은 이 제도의 운용과정에서 경신과 체결한 대차계약을 수시로 갱신하고 그 사이에 해당주식을 전매 환매하여 차액만 결제할수 있었으므로 명색은 현물거래였지만 사실은 정기거래 즉 청산거래의 성격을 가졌다.

경취는 그해 2월 경신의 창립주식 2만주(자본금 100만원) 가운데 3분의 1을 인수하고 중역 대부분을 직접 파견했으며 4월10일 창립총회를 연후 같은달 28일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경신은 입체금 확보를 위해 조선실업은행 조선상업은행등과 교섭, 재할인담보대출을 받기로 한후 다음달인 5월7일 후장부터 단기거래가 시작됐다.

경취의 숙원이던 전매 환매 및 차금결제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경취주 1년만에 12배 폭등 증권주파동 태동

단기거래가 시작되면서 경취주의 거래량은 급증하기 시작했다. 1920년부터 조금씩 늘기 시작한 거래량은 1921년 3월엔 7613주로 급증한 후 5월 단기거래가 시작되면서 하루 거래량이 2만9000주까지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막대한 수수료 수입이 발생하면서 경취의 순익은 급증했으며 주가도 치솟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경취 개장시 12원50전이었던 주가가 1920년 12월엔 주당 22원, 1921년 3월엔 37원, 5월엔 62원까지 가파르게 올랐으며 그해 8월엔 141원대까지 폭등했다. 1년만에 12배 가까이 뛴셈이다.

9월엔 110원대로 잠시 조정을 받다가 10월엔 재차 130원대까지 만회했다. 거래비중도 급속히 커지면서 1921년 1,2월엔 전체거래량의 38% 수준이었으나 8월에는 58.9%, 9월에는 69.5%까지 높아져 당시 최고의 미인주로 등극했다.

증시 호황으로 중매인의 수입도 크게 늘어 오늘날 증시 활황으로 증권사의 수입이 늘고 증권주가 많이 오르는 것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한국증시 최초 증권주파동인 경취주 파동은 이때 터져나왔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주신 분 = 증권연구가 위문복 (www.ahamedia.co.kr)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  
  •    
맨 위로

ⓒ 프라임경제(http://www.newsprime.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