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르망 24시간(24 Heures du Mans)은 빠른 차만 살아남는 무대가 아니다. 24시간 동안 차를 달리게 만드는 물류, 정비, 인력, 장비, 현장 운영 능력이 함께 버텨야 완주가 가능하다. 한 대의 경주차가 서킷 위에서 기록을 세우는 동안, 트랙 밖에서는 또 다른 레이스가 동시에 진행된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Genesis Magma Racing, 이하 GMR)이 세계 최고 권위의 내구 레이스로 꼽히는 르망 24시간 하이퍼카 클래스 데뷔전을 마친 장면도 이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GMR-001 하이퍼카는 6월13~14일(현지시간) 프랑스 라 사르트 서킷(Circuit de la Sarthe)을 달리며 24시간의 레이스를 완주했다. 제네시스가 글로벌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브랜드의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다만 이번 르망의 의미는 경주차 한 대의 완주에만 놓이지 않는다. 현대차그룹은 GMR의 레이스 운영을 지원하기 위해 수소 물류와 로보틱스 기술을 현장에 투입했다. 현대자동차의 엑시언트 수소전기트럭(XCIENT Fuel Cell)과 현대차·기아 로보틱스랩의 산업용 착용 로봇 엑스블 숄더(X-ble Shoulder)가 르망 현장 뒤편에서 움직였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에 제공된 현대차 엑시언트 수소전기트럭(XCIENT Fuel Cell). ⓒ 현대자동차그룹
모터스포츠는 완성차 브랜드의 기술력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무대다. 동시에 극한의 운영 환경을 갖춘 실증 현장이다. 레이스카의 내구성, 드라이버의 집중력, 정비 인력의 체력, 장비 이동의 효율이 한꺼번에 시험대에 오른다.
현대차그룹이 이번 르망에서 수소전기트럭과 착용 로봇을 투입한 이유다. 전기차와 고성능차만으로 브랜드 기술력을 말하던 시대에서, 기업이 보유한 에너지·물류·로보틱스 역량까지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는 방식이 중요해지고 있다.
◆차를 달리게 하는 또 다른 조건 '물류'
레이싱팀 운영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동이 필요하다. 테스트 장비, 예비 부품, 타이어, 정밀 계측 장비, 정비 도구가 경기장 안팎을 오간다. 내구 레이스일수록 물류의 역할은 커진다. 차가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필요한 장비가 필요한 시간에 현장에 도착해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이 과정에 엑시언트 수소전기트럭을 활용했다. 엑시언트 수소전기트럭은 수소 연료전지 시스템을 적용한 대형 트럭으로, 주행 중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 이번 르망 현장에서는 GMR의 장비 이동을 맡으며 수소 상용차가 모터스포츠 운영 인프라 안에서도 쓰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 업무에 활용된 현대차·기아 로보틱스랩 산업용 착용 로봇인 엑스블 숄더(X-ble Shoulder). ⓒ 현대자동차그룹
여기서 중요한 점은 '친환경'이라는 익숙한 구호보다 사용처의 변화다. 수소전기트럭은 그동안 도로 화물, 항만, 산업 물류 영역에서 주로 언급돼 왔다. 이번에는 세계적인 모터스포츠 현장에서 경주차 운영을 떠받치는 물류 장비로 등장했다. 수소 상용차의 활용 범위가 일반 운송을 지나 고강도 이벤트 운영까지 넓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엑시언트 수소전기트럭을 유럽 시장에서 운행하고 있다.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 유럽 5개국에서 총 175대가 운행 중이다. 상용차 시장에서 수소 기술은 승용차보다 더 현실적인 선택지로 자주 거론된다. 장거리 운행과 짧은 충전시간, 대형 적재 수요가 맞물리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르망 현장은 이 같은 특성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무대가 됐다.
◆24시간 레이스가 시험한 사람의 체력
르망은 차의 내구성만 시험하지 않는다. 사람의 체력도 함께 소모한다. 정비 인력은 24시간 동안 긴장을 유지해야 하고, 타이어와 장비를 반복적으로 다뤄야 한다. GMR-001 하이퍼카의 타이어 1개 무게는 13㎏에 달한다. 차량당 최대 56개의 타이어와 각종 중장비를 다루는 과정은 정비 인력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이어진다.
현대차그룹은 이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엑스블 숄더를 현장에 투입했다. 엑스블 숄더는 어깨 관절의 부하를 최대 60%, 전방과 측방 삼각근 활성도를 30%가량 낮춰주는 산업용 착용 로봇이다. 르망 현장에서는 타이어와 장비 상·하차 작업 등에 활용되며 정비 인력의 피로를 줄이는 역할을 맡았다.

르망 24시간 현장에서 최초로 공개된 제네시스 박스 버기(Box-Buggy) 콘셉트. ⓒ 현대자동차그룹
착용 로봇이 의미를 갖는 지점은 생산성 향상에만 있지 않다. 산업 현장의 자동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의 판단과 손이 필요한 영역은 남아 있다. 특히 모터스포츠 현장처럼 예측 불가능성이 큰 환경에서는 모든 작업을 기계로 대체하기 어렵다. 엑스블 숄더는 사람을 대신하는 로봇보다 사람의 신체 부담을 줄여주는 보조 기술에 가깝게 작동한다.
이 대목은 현대차그룹 로보틱스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공장 생산라인에서 출발한 착용 로봇 기술이 정비, 물류, 서비스 현장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르망은 극한의 무대다. 그곳에서 쓰인 기술은 일반 산업 현장에서도 설득력을 갖기 쉽다. 반복 작업, 중량물 취급, 어깨 위로 이뤄지는 작업이 많은 분야라면 착용 로봇의 수요는 더 커질 수 있다.
◆서킷 밖에서 보여준 제네시스의 이동 경험
서킷 밖에서는 제네시스 박스 버기(Genesis Box-Buggy) 콘셉트가 공개됐다. 박스 버기는 르망 현장에서 VIP 의전을 맡은 콘셉트 모빌리티다. 각 바퀴를 독립적으로 제어해 네 바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고, 제네시스 고유의 이중 라인 헤드램프 디자인과 높은 지상고를 갖췄다.
박스 버기는 앞서 언급한 수소전기트럭이나 착용 로봇처럼 레이스 운영의 핵심 장비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브랜드가 모터스포츠 현장을 어떻게 고객 경험의 공간으로 바꾸려 하는지는 보여준다. 팬 빌리지와 경기장 곳곳을 오가는 이동수단이면서, 제네시스가 생각하는 미래 모빌리티 경험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됐다.

르망 24시간 결승선을 통과하는 GMR-001 하이퍼카 #19 차량. ⓒ 제네시스 브랜드
최근 완성차 브랜드들은 모터스포츠를 기록 경쟁의 장으로만 쓰지 않는다. 기술 실증, 브랜드 경험, 고객 접점, 지속가능성 메시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무대로 활용한다. 제네시스가 르망에서 하이퍼카를 달리고, 현대차그룹이 수소전기트럭과 착용 로봇을 투입하고, 박스 버기까지 선보인 흐름도 같은 맥락이다.
GMR의 르망 완주는 제네시스에게 고성능 브랜드로 나아가는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현대차그룹 입장에서는 조금 다른 질문을 남겼다. 빠른 차를 만드는 능력에 더해, 그 차가 움직이는 현장을 얼마나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하게 운영할 수 있는가. 이번 르망에서 수소 물류와 로보틱스 기술이 맡은 역할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었다.
차는 트랙 위에서 달렸고, 기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버텼다. 르망 24시간이 제네시스의 도전 무대였다면, 현대차그룹의 수소·로보틱스 기술에는 실전 운영 능력을 확인한 현장이었다.